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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Jul 26. 2021

서른여섯 여자 인간의 운전면허 도전 시작

첫 번째 이야기: 드디어 면허를 따야 할 이유가 생겼다.


가끔 그런 악몽을 꿀 때가 있다.

내가 도로에서 직접 운전하는 꿈.


나는 태어나서 운전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누구나 막연히 두렵고 자신 없는 분야가 있을 것인데 내겐 그것이 '운전'이다. 천성이 겁이 많고 지독한 길치인 데다 상상력은 풍부하다 보니 내가 운전을 하게 됐을 때 일어날 법한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가 자꾸만 머릿속에 팝업 되곤 했다.


'브레이크랑 가속페달을 헷갈려서 쿵 박아버리면?'

'길을 잘못 들어서 내가 역주행을 하고 있으면?'

'옆 차선에 있던 차가 갑자기 훅 끼어들면?'

'다른 차가 중앙 분리대를 넘어서 날아오면?'

'앞에 있는 트럭의 짐 더미가 와르르 쏟아지면?'


'그래... 나는 그냥 운전을 안 하는 게 낫겠다'


나의 최종 결론은 운전을 안 한다는 쪽이었다.


요즘 세상에 운전 못하면 바보라고 친정 아빠가

가끔 가감 없는 돌직구를 날릴 때 빼고는, 살면서 운전 못해서 불이익을 받거나 불편할 일이 없었다. 남편도 나를 잘 알기에 오히려 내가 면허를 딴다고 할까 봐 벌벌 떠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36년을 버틴 것이다.


그랬던 내가 갑자기 운전면허에 도전하게 되었다. 두 미니 인간들이 크면서 같이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올여름 계획했던 제주 한달살이였다. 처음엔 한 곳에서만 계속 머물러 있을 작정이어서 운전은 내게 그리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아이들과' 제주에서 정말 차 없이 생활할 수 있겠냐는 공통된 우려를 나타냈다.


운전 안 하고 여행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요리조리 연구해보니 두 미니 인간들을 데리고는 정말 여행이 아닌 고행을 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광활한 제주도에서 한여름 뙤약볕 아래 길을 헤매며, 아이들에게 몹쓸 트라우마를 안겨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운전에 발목을 잡히는 구만'


뭔가 진 듯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운전면허를 따야 할 이유가 생겨서 기도 했다.


'그래! 내가 운전 배운다 배워!'


쫄보 자아가 금방 또 고개를 쳐들기 전에 학원부터 등록해놓으려고 운전면허학원으로 달려갔다. 운전 학원에 들어서자 노란색 교육용 엑센트들이 기능 연습장 코스를 따라 느릿느릿 돌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나대기 시작했다.


범퍼카 아닌 진짜 자동차

'나 진짜 운전 배우는 거야?'


평생 안 해본 일에 도전하는 것은 어쨌든 참 설레고 떨리는 일이었다. 이미  내면의 세상에서는 이태원 클라쓰 ost인'시작'의 전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는 힘이 잔뜩 실린 손으로 접수 대기 번호표를 뽑아 상기된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렸다. 세상을 정복할 수도 있을 만한 기운이었다.


'띵동'


내 위대한 도전의 서막을 알리는 소리였다. '띵동' 소리와 동시에 대기석을 쓸데없이 힘차게 박차고 나가 접수대로 갔다.


"신규 등록하려고요."


운전을 못하던 세상에서 운전을 할 줄 아는 세상으로 갈 것이라는 공식적인 선포였다.


".. 여기 이거 먼저 작성하시고요.. 안내문 읽어 보시구요..."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접수대 직원은 세상 지루한 표정으로 등록 양식 한 장과 안내문 몇 장을 건넸다. 볼펜으로 등록원서를 꾹꾹 눌러 작성하고는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어봤다.


"저기.. 학과 수업은 오늘 등록하면 바로 들을 수 있나요?"


그러자 직원은 아까 종이를 건네던 그 무향무취의 곤약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일 예약은 어렵고요.. 오늘 자리가 있을지는 수업에 가봐야 아는 거구요.." 


"그럼 선착순인 건가요?"


그러자 답답하다는 듯 직원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예약이 다 차면 못 들으세요"


"???"


난 도무지 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번 더 물었다간 멱살을 잡힐 것 같아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추가 질문을 꿀꺽 삼켰다.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도전 드라마 bgm은 어느덧 '띠로리리리 리리 리리' 하는 국민 현타송인 인간극장 엔딩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시 푹 꺼져버린 내 기분은 앞으로 내가 인고해야 할 재미없고 삭막한 시간들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단계별 운전시험들, 왕초보 운전자로서 감당해야 할 긴장과 숱한 시행착오, 무엇보다 앞으로 남편에게 당할 구박과 수모를 생각하니 카드 결제를 도로 취소하고픈 충동이 용솟음쳤다.


그때부터 등록을 취소해야 할 오만가지 이유들이 줄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애들 곧 방학인데 운전 배우러 다닐 시간이 될까?'

'사실 차 끌고 다닐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은데'

'차 사고 나면 돈 줄줄 새 나갈 텐데 내가 운전 안 하는 게 오히려 돈 버는 거 아닐까'


합리화 마귀의 기세가 아주 대단했다. 그래도 그날, 나는 결제 취소를 하지 않았다. 결제라는 쐐기를 박고 오면서 이번에는 무조건 면허를 따 보자고 나 자신을 얼르고 달랬다. 십 년 뒤, 마흔여섯이 되어서 똑같은 고민을 하는 나는 정말 별로일 것 같아서다. 나는 이런 느낌을 타이밍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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