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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Sep 27. 2021

길치의 첫 도로주행 시험

나는 울었다.


지난 주말에 도로주행 시험을 쳤다. 필기와 기능시험을 단번에 통과하고도 도로 주행시험에 세 달이나 뜸을 들인 이유는 길을 못 외워서였다. 시험 당일날 A, B, C, D 중에 어느 코스가 걸릴지 모르니 네 개를 다 외우고 있어야 는데, 길치 말기 환자인 내게 그것은 거의 고시 수준의 학습량을 요하는 일이었다.


세 달 동안 운전학원 유튜브 채널에서 제공하는 코스별 실제 주행 영상을 수백 번 돌려 보면서 길을 외웠다. 그 영상에 깔리는 배경음악이 환청으로 들릴 정도로 집요하게 보고 또 봤다. 족히 백번은 돌려 봤는데 볼 때마다 헷갈리는 부분이 발견되었다. 혹시  지능 문제가 있는 건가 살짝 고민이 될 정도였. 내겐 실제 도로에서 주행 연습을 할 수 있는 연습 면허증이 있다. 연습 면허 소지자는 운전 경력 2년 이상의 동승자가 있을 때 실전 연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집 세고 까다로운 남편은 끝까지 나에게  운전대를 넘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세 달 동안 주행 영상 주야장천 는 것이었다.


도로 주행시험은 토요일 오후 1시였다. 시험장에 갔더니 40~5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컴컴한 지하 야외 대기장에서 어미새를 기다리는 아기새들처럼 두리번거리며 앉아 있었다. 강사님 한분이 앞에 나와서 시험에 대해 간단히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셨다. 4인이 1조가 되어 한 차량으로 시험을 치게 되는데 시험 순서는 랜덤으로 정한다고 하셨다. 1번인 사람이 제일 먼저 시험을 치고 돌아오면 2번이 시험을 치고, 그다음은 3번, 맨 마지막에 4번이 시험을 치는 방식이었다. 강사님께서 4번 수험자는 시험을 치기까지 약 1시간 30분 정도 대기해야 할 거라는 잔인한 팩트를 덤덤하게 알려 주셨다. 시험만으로 긴장감이 포화 상태인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시험 순서에 대한 두려움까지 추가되어 온몸이 오돌오돌 떨릴 지경이었다. 기도가 절로 터져 나다. 제발.. 3번까지도 좋으니 4번은 아니게 해 달라고.


지하인데 야외인 특이한 대기장소

잠시 뒤, 강사님은 조별로 네 명씩 이름을 호명하셨고 내 이름이 제일 마지막에 불리었다. 4번에 당첨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최후까지 대기장을 지키는 여러 4번들 중 한 명이 되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느덧 우리 조 3번 차례가 되었고, 담당 시험관분이 3번 수험자분 어깨너머로 급격히 지쳐 가고 있던 4번 수험자, 30대 후반의 여성인 나를 발견하시고 불쌍해 보였는지 같이 올라가자고 하셨다. 혹시 3번 수험자 차량에 동승해서 시험 참관의 기회를 주시려나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올라갔지만 코로나 시대에 그건 아니 될 말이었다. 강사님은 한 곳에 앉아 있으면 더 힘들다며 채광이 좋은 지상 대기장에서 계속 기다릴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극도의 긴장 속에 하염없이 대기하고, 그 징그러운 배경음악이 깔린 주행영상을 무한 시청하는 이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으려면 오늘 무조건 합격을 해야 했다.


쾌적한 대기장

지상 대기장에 앉아 있으니 기능 시험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핸들을 잡기 시작한 연습생들이 조심스럽게 코스를 돌거나 직각주차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처럼 래도 내게 남은 관문 도로 주행 하나밖에 없다는 소한 행복감에 잠시 젖었. 그때 우리 차량 감독관님이 내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3번 수험생과 떠나신 지 15분도 채 안된 시점이었다.


시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시작되었다. 3개월 만에 처음 잡아보는 운전대였다. '인간이 3개월 동안 영상으로만 운전을 익혔을 때 과연 실전에서도 효과가 있을까'라는 가설을 놓고 손수 생체 실험을 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고 운전학원 출구를 빠져나가면서 강사님께 슬쩍 물었다.


"저.. 아까 그 3번분, 예정보다 일찍 끝난 것 맞죠?"

"아.. 그분은 입구 나가자마자 신호 위반으로 바로 실격됐어요"

"아......"

"남이 어쩌든 나만 신경 쓰면 돼요."

"아... 네..."


나는 3번 수험자의 소식을 듣고 더 긴장이 되었다. 몇 분 뒤 내 모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호위반과 속도위반 이 두 가지는 얄짤없는 실격 사유이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한다.


코스 뽑기에서 나는 C코스가 뽑혔다. C코스는 네 가지 코스 중 유일하게 바로 좌회전을 들어가는 코스였기 때문에 길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차선 변경이 좀 까다로운 코스였다.


핸들을 오랜만에 잡았더니 차 폭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다. 핸들 쪽으로 몸을 바싹 당기고 앉아 누가 봐도 쌩초보 딱 티 나는 아우라를 풍기며 핸들을 요리조리 계속 조정했다. 다행히 대로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통과하면서 세 달 전, 도로주행 교육 때 운전대를 잡아봤던 기억이 되살아났고 순탄하게 고가도로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수 백번의 두뇌 시뮬레이션을 통해 C코스는 훤희 꿰고 있었기에 내 운전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대로만 가면 당연히 합격이라고, 어쩌면 나는 운전에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전방에 초록불을 확인하고 우회전을 하려던 순간, 내비게이션 여인이 이상한 쌉소리를 했다.


"실격입니다"


신호도 잘 지켰고 이렇게 속도도 느린데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며 모른 척 그대로 우회전을 해서 직진하고 있는데 강사님께서 표정으로 평가지를 주섬주섬 모아 정리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음.... 실격하셨네요. 일단... 일단... 저기... 갓길에 차 대보세요"

"네?!"


심장이 따가울 정도로 쿵쾅쿵쾅 돌팔매질을 해댔다. 나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런데 강사님이 차를 세우라고 할 때 '일단'이라는 부사어를 두 번이나 사용한 것이 나름 한줄기 희망으로 다가왔다. 혹시 평가 기계가 오작동되어서 '일단' 세워보라고 하신 걸까? 아니면 내가 오랫동안 대기한 노고를 감안해서 한번 더 기회를 주려고 '일단'이라는 여지를 남긴 걸까?


나는 '일단'이라는 지푸라기를 부여잡고서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머치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다. 잔뜩 쫄아서 숨을 죽이고 강사님의 다음 말을 기다다.


"흠.... 속도위반이에요. 어린이 보호구역인데 30km를 조금 넘었나 보네. 수험자분이 그래도 의식을 하셔서 바로 속도를 줄이긴 줄였는데...  아휴.. 뭐 아쉽게 됐네요. 조금이라도 오버되면 바로 실격이라서 이건 뭐.... 어쩔 수가 없어요"


이런 걸 청천벽력이라고 하는 건가. 이 사자성어의 글자 하나하나 내 뼈를 강타하는 느낌이었다. 강사님은 나보고 내려서 뒷좌석으로 옮겨 앉으라고 하셨고, 강사님이 운전을 해서 학원으로 돌아갔다. 나는 뒷자석에서 불치병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강사님은 운전을 하시면서 나의 도로주행을 평가 및 피드백을 해주셨다.


"자 이제부터 4번 수험자분이 고쳐야 될 운전 습관이나 개선해야 될 부분을 얘기해줄 거예요. 보완을 하셔서 다음 시험 때는 실수 하지 않도록 하세요"

"네에..........."


아... 그렇게 기다려서 시험 쳤는데 실격이라니... 그럼 나는 이 짓을 하러 또 학원에 와야 한다는 건가.. 그 징그러운 유튜브 도로주행 영상을 또 계속 봐야 하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에 난 지금 막 죽을 것 같은데 강사님은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한 듯 흔들림 없이 브리핑을 시작하셨다. 실격한 마당에 피드백이고 나발이고 그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네...'라고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콧등 시큰해지면서 곧 안구에 뜨뜻한 물이 밀려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이 나이 먹고 도로주행 시험 떨어졌다고 쳐 우는 건 너무 창피한 일다. 심호흡과 손 부채질을 열나게 해서 눈물, 콧물을 증발시켰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피드백이라도 건져 가야지 싶어 간신히 귀를 열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내 핸들 조작이 미숙하고 깜빡이를 너무 늦게 넣는 경향이 있으니 개선하라는 것이었다.


"네......"


운전학원 사무실로 돌아가 재응시료 55000원을 내고 다음 주 토요일 1시로 또 예약을 잡았다. 아까운 내 돈. 55000원이면 명륜진사갈비에서 무제한으로 갈비를 뜯을 수 있는 돈인데. 나는 3개월간 준비해서 도전한 도로주행 첫 시험이 결국 새드엔딩으로 끝이 났다는 좌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제는 도로주행 시험을 다시 본다고 해서 합격할 자신도 없었다. 실패는 인간을 겸하게 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육체와 정신 매우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본 투 비 길치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증명이라도 하듯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을 못 찾고 한참을 헤맸다. 20분을 헤매다 보니 꾹꾹 참고 있던 서러움과 억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눈물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제일 만만한 남편에게 전화해서 한 시간 반이나 기다린 도로주행 시험에서 광탈했고 지금은 길까지 잃어서 짜증 나 죽겠다고 흐느꼈다. 지나가던 꼬맹이가 날 쳐다보든 말듯 상관없었다.


12시에 집을 나섰던 나는 오후 5시가 되어서야 귀가를 할 수 있었고 그날은 역대 가장 우울한 토요일 오후가 되었다. 다음 주 재시험은 어떤 엔딩이 될까. 해피엔딩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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