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주행 재시험 치러 가는 길에 울었던 이유
운이라 쓰고 실력이라 부른다.
첫 도로 주행 시험 탈락 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많이 떨어져 본 사람이 안전 운전하더라"
"우리 아파트 5층 아줌마는 주행 10번 떨어졌는데 지금까지 무사고래"
"원래 너무 쉽게 배우면 못 쓰는 거야"
"운이 안 좋아서 떨어진 거야"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까짓 운전면허 금방 딴다고 용기를 주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운이 안 좋아서 그렇다는 말을 웃어넘기지 못한다. 나는 정말로 운이 안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단 살면서 가위 바위 보, 사다리 타기류의 내기에서 이겨본 적이 거의 없다. 모처럼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나서 가면 늘 그 식당은 문을 닫았다. 세일 행사 때도 내 차례 바로 앞에서 마지막 수량이 끝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도로주행 시험 순서가 모두가 기피하는 4번이 됐을 때도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만약 내가 운의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계급이 나뉘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면 지금쯤 인도의 어느 대형 빨래터에서 하루 종일 손빨래를 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따라서 운전 실력까지 폭풍우에 덜렁이는 간판만큼이나 위태로운 나 같은 사람은 시험 순서 운, 감독관 운, 코스 운, 그날의 도로 사정 운 등, 점수에 영향을 주는 많은 요소들이 다 맞아떨어져야 겨우 합격이다.
내가 운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이란 걸 백번 인정하고 기대치를 낮춰 보려 해도 처절하게 노력하고 맘 졸였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라 속이 쓰라렸다. 아오 도대체 왜 내 인생은 뭐하나 쉽게 주어지는 법이 없냐며, 역시 제일 만만한 남편을 관객으로 모시고 한풀이 공연을 선보였다. 나의 원성 풀이 공연 한바탕에 남편은 그렇게 멘탈 관리를 못할 거면 운전을 안 하는 게 맞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모순된 화법으로 화답해 주었다.
운전 시험을 치면서 인간이 얼마나 착각에 잘 빠지는 존재인지 또 한 번 느낀다. 처음부터 운전은 내 삶에서 가장 자신 없는 영역이라며 거의 불가능에 도전하는 비장함으로 시작해놓고 필기, 기능시험을 한방으로 통과하더니 도로 주행시험도 당연히 한 번에 붙을 거라 기대를 해버린 것이다. 열 번 아니 스무 번을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한 번에 못 붙었다고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아주 생쇼를 했다. 다행히 시험에 떨어진 덕분에 다시 주제 파악이 되었고 지금은 매우 겸손해진 상태다. 나는 나 자신에게 5층 아줌마보다 더 많이 떨어질 수 있으니 당황하지 말라고 미리 좌절 백신을 놔주었다.
또다시 일주일간 눈이 빠지게 학원 도로주행 영상을 무한반복 시청했다. 이번에는 길 외우기 뿐 아니라, 코스마다 포진된 어린이 보호구역을 파악하는데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 도로에서는 오차범위 내 속도 초과가 허용되지만, 어린이 보호구역에서는 단 0.0001km만 초과해도 실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내 담당 강사님은 도로주행 교육 3일 동안 그 중요한 얘기를 안 해줬을까? 너무 기본적인 거라 내가 알 거라고 지레짐작한 것인가? C코스 주행 영상 댓글에는 나와 똑같은 구간에서 실격했다는 이들이 수두룩 쏟아졌고 같은 실패를 경험한 동지들에게 나는 평소 달지도 않던 댓글에 대댓글 까지 달아가며 격공을 표시했다.
드디어 두 번째 시험 당일날 아침, 남편과의 사소한 다툼이 전쟁급 싸움으로 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저히 운전 시험 칠 기분이 아니어서 취소할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응시료 오만 오천 원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냥 그까짓 돈'하고 쿨하게 넘겨버리기엔 꽤 큰돈이었다. 이런저런 기회비용을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좀비 같은 몰골로 지하철을 탔고 시험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고자 습관적으로 도로주행 영상을 플레이시켰다. 눈은 영상을 향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뇌 백색질의 활동이 증가하면서 혈류의 흐름이 활발해지고 있는 현상, 즉 멍을 때리고 있는 거였다. 네 정거장 정도 멍을 때렸더니 어느새 머리가 맑아졌고 불현듯 어떤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 순간 심장은 뛰는 법을 잊어버린 듯 버퍼링이 걸렸다. 귀도 먹먹해져 오는 것 같았다.
'헐...... 허얼...... 허얼'
시험 원서를 홀랑 놓고 온 것이다. 남편이랑 투닥투닥하다가 멘탈과 함께 시험 원서도 시원하게 집에 놓고 왔다. 내가 아는 한, 시험원서가 없으면 재시험을 칠 수 없다. 남편에게 sos전화를 했다. 비록 싸웠지만 그 순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밖에 없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시 걸었는데도 안 받는다. 아.. 이 써글 놈.. 일부러 안 받는 거다.
운전학원에 전화를 했다. 이미 내 눈에는 뜨거운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신분증은 있는데 어떻게 안 되겠냐, 일단 시험 치고 나서 바로 원서를 갖고 오면 안 되겠냐, 이런저런 질문을 해보아도 직원은 원서가 없으면 재시험불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오랜 세월 다져진 바위 같은 단호함 앞에 아무리 읍소해봤자 내 마음에 스크래치만 더 생길 뿐 얻을 것은 없어 보였다.
나: 네... 알겠습니다..
직원: 일단 오세요....
나: 아! 정말요? (드디어 내 말이 먹힌 건가?!)
직원: 오셔서 시험 연기하고 가세요.."
나: (헐) 아..... 연기도 직접 가서 해야 하나요? 전화로는 안 되는 건가요
직원: 네... 무조건 오셔서 연기하셔야 합니다...하암...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노관심인 세상 나른하고 사무적인 말투 때문에 더 억장이 무너졌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시험 연기도 직접 와서 해야 된다는 건가. 아... 역에서도 도보로 20분 걸리는, 더럽게 멀기도 먼 운전학원에 직접 가야 한다니. 시험 원서라는 종이 쪼가리 한 장을 못 챙긴 여파가 이리 클 줄이야. 학원으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으며 뜻밖에 원치도 않는 유산소 운동을 하는 동안 또 눈물이 났다. 지난번에 시험에 떨어지고 울었던 그 골목길이었다. 일주일 동안 맘 졸인 것이 허망하기도 하고 이제는 전화를 걸어 하소연할 데도 없다는 것이 그날의 눈물 버튼이었다. 눈에 손부채질을 해가며 눈물을 말린 후 신청서를 작성하고 접수창구 앞에 섰다.
"오늘 시험날인데 원서를 안 갖고 와서요... 시험 연기하려고요..." (나 열라 불쌍하지 않나요. 한 번만 봐주세요.)
접수원은 아무 말없이 내 신청서를 받아 보더니 내가 작성한 건 도로주행 시험 신청서가 아니라 기능시험 신청서라고 했다. 하아... ㅂ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운전면허를 치러 와서 나는 왜 덤 앤 더머를 찍고 있는 것인가. 이쯤 되니 오늘 도로 주행 시험이 연기된 건 어쩌면 신의 한 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정신 상태로 도로 위에 나갔다간 여러 사람 신세를 조질 수도 있었다. 슬퍼할 게 아니라 잔치를 벌여야 할 타이밍인가. 도로주행 시험 신청서를 찾아 다시 작성하고 접수원에게 제출했다. 타닥타닥, 소리마저 불친절한 키보드 소리를 내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음번에 다시 연기하게 되면 그때는 응시료 다시 내셔야 해요. 1회만 해드리거든요!"
"네........(그래 나도 내 잘못인 건 알아. 근데 어지간히 해라 너도..)
접수원은 눈물도 다 마르지 않은 내게 굳이 묻지도 않은 학원의 연기 정책을 읊어주며 내 흐물흐물해진 멘탈에 어퍼컷을 날렸다.
아.. 엄마.. 순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던 건 왜 일까? 집으로 오는 길에 기분 나쁜 날이면 꼭 생각나는 Daniel powter의 Bad day를 들었다. 갑자기 스스로가 짠해서 평소보다 좀 더 비싸고 맛있는 아이스 라떼와 진짜 우울할 때만 먹는 특효약 뚱카롱을 사 먹었다. 약간의 사치를 가미한 슈거 크러쉬에 세상 다 무너질 것 같았던 기분이 스르르 풀렸다. 에휴 그래... 사는 거 뭐 있어? 맛있는 거 먹고 푸는거지.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