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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Jan 06. 2022

도로주행시험에서 느리게 운전했을 때 생기는 일

또 울고 싶지 않았다.


4일 후, 세 번째 같은 두 번째 도로주행 시험날이 되었다.


남편이 재택이라 이번에는 처음으로 주말이 아닌 평일 오후 한 시에 시험을 친다. 미니 인간들의 등교를 완료시키고 바로 근처 스타벅스로 갔다. 오후 시험이기 때문에 오전 내내 이곳에서 코스별 주행 영상을 보며 마지막 점검을 할 생각이다. 아직 시험까지는 3시간 남짓 남았지만, 지난번 실격하던 순간의 심상이 되살아나 벌써 긴장이 되었다.


평일 찬스로 운전학원 셔틀을 예약했다. 시간 맞춰 나가니 운전학원 홍보 스티커로 사면이 도배가 되어 있는 노란 승합차가 보였다. 그 차에나 혼자였고 그 큰 차를 전세 내서 타고 가려니 점잖게 말하자면 송구스고 내 식으로 말하자면 뻘쭘하기 그지없었다. 어색한 기류를 감지한 듯 기사님은 백미러로 나를 흘끔 보시더니 말을 걸어오셨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오늘 등록하러 가는 거예요?"

"아니요. 도로 주행 시험 치러가요. 그동안 주말에만 가서요."

"아이고.. 긴장되시겠네요"

"네..... 이번이 두 번째 시험이에요. 하...."

"운전을 할 때는 어깨 힘을 빼고 편안하게.. 그리고 시야는 넓게 해야 잘할 수 있어요"

"네... 떨어지고 나니까 더 긴장되네요"

"잘할 겁니다. 시험 잘 치세요. 파이팅!"

"감사합니다.."


나는 기사님과 나눈 짧은 대화를 통해 뜻밖에 힘을 얻었다. 운전 학원이라는 환경 안에서 따뜻한 말 한마디란 점점 사멸해가는 희귀 언어 같은 것이어서 '파이팅'이라는 말이 무척 생경하게 들렸. 셔틀은 시험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오전 내내 안구가 무지근해지도록 주행영상을 봤기 때문에 또다시 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싶진 않았다.


지친 심신을 환기시킬 겸 운전학원 주변을 조깅하기로 했다. 가볍게 뛰면서 폐기 철물이 쌓여 있는 공터를 지나 오래된 철공소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로 들어섰다. 철공소 직원분들이 이른 점심식사를 마친 후, 이쑤시개를 물고 배를 쓰다듬으며 느그적 느그적 걷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 빨간 백팩을 메고 철공소 골목을 명랑하게 폴짝폴짝 달리고 있는 이질적인 내 이미지가 전지적 시점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철공소 풍경은 계속 이어졌다. 막다른 골목으로 가는 건 아닌지, 이러다 운전학원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불안감이 증폭되어 발길을 돌리고 싶어 지던 찰나, 하천 산책로로 이어지는 육교를 발견했다. 육교를 건너니 비로소 내 무구한 뜀박질에 딱 어울리는 배경이 펼쳐졌다. 꽤 많은 사람들이 점심 짬 시간을 활용해 걷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몸을 좀 움직였더니 머릿속에 잔류해서 끄럽게 맴돌고 있던 주행영상 배경음악 서서히 씻겨져 가는 것 같았다.


어느덧 시험시간이 되었다. 지난번과 똑같은 강사님이 앞에 서서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멘트로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셨다. 그리고 곧바로 시험보다 더 긴장되는 시험 순서 발표의 시간이 이어졌다. 4번에 한 번이라도 걸려본 사람이라면 이 순간 식은땀이 나고 머리 밑이 서늘해질 것이다. 추운 야외 대기장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두 시간 가까이 대기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 잡는 무료함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한 번이면 족한 그 느낌. 한번 더 걸리면 빈정이 많이 상할 것 같은 그 느낌 말이다. 3번이라도 좋으니 4번 만은 피하고 싶었다.


검정관 분들이 씩 나와서 네 명의 수험생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자, 시험 순서 불러 드리겠습니다. 1번 김 아무개... 2번 이 아무개..... 3번 박 아무개... 4번....."


'윽.....'


나는 숨을 멈추고 주먹을 꽉 쥐었다.


"4번... 조 아무개"


'휴........'  


다행히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다음 검정관 분이 나오셨다.


"순서 부를게요. 1번.."


'제발.....(내 이름 좀)'


1번, 2번까지는 내 이름이 불리길 기도했고, 3번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제발 그 입에서 내 성씨가 튀어나오지 않길 간절히 기도했다. 너무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검정관님들이 한분씩 호명을 마칠 때마다 삼국지 게임에서 전위가 휘두른 삼지창에 얻어맞은 것처럼 수명이 쑹덩 쑹덩 깎여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대기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명되었고 내 이름이 나올 차례도 그만큼 가까워오고 있었다. 시험순서 정하기는 웬만한 스릴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쫄깃하고 생동감 있는 공포를 선사하였다.


드디어 마지막 검정관님이 나오셨다. 이 스릴러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것이다.


"1번.... 이 아무개.. "


'헉... 또 나는 아니구나... 그렇다면 이번에도 4번인가.. 아....'


지난 내 삶의 빅데이터와 메커니즘을 미루어 볼 때 4번에 또 걸릴 확률이 높아 보였다. 이미 4번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동공이 풀리려고 할 때쯤 복음이 들려왔다.


"2번 신 OO..... 3번..."


오 마이 지저스. 내 이름이었다. 3번도 감개무량한데 무려 2번이라니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정말 그 순간만큼은 주행에 떨어져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기뻤다.


환희도 잠시, 도로 주행시험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다시 일렁였다. 주변에 앉아 있는 수험자들의 대다수는 한 손에 폰을 들고 주행 영상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금 영상을 본다고 떨어질 시험을 붙는 건 아닐 테지만 또다시 이곳에 오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발현일 것이다. 나도 코스 영상은 너무 많이 봐서 더 이상의 시청은 무의미했지만 과감히 아무것도 안 하거나 혹은 딴짓을 할 만큼 강심장은 못 되었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또 영상을 틀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자기 만족감이라도 두둑이 챙겨가고 싶 미련이다.


우리 조 1번 수험자가 감독관님과 함께 사라진 지 20분도 지나지 않아 내 차례가 되었다. 1번 수험자는 결국 코스를 완주하지 못하고 뒷좌석에 실려 돌아왔으리라 추측되었다. 나는 차에 타서 제일 먼저 안전벨트를 매고 좌석을 내 몸의 사이즈에 맞게 조정했다. 이번에 내가 세운 합격 전략은 무조건 천천히 가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어린이 보호구역 속도위반으로 떨어졌으니 속도만 주의하면 합격할 수 있으리란 판단이었다. 생각해보면 속도가 느려서 운전면허에 떨어졌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저속을 유지하는 것이 안전빵일 것이라는 추론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코스 랜덤 뽑기에서는 난이도가 가장 평이한 A코스가 걸렸다. A 코스는 구간 전체가 어린이 보호구역이나 다름없으니 오늘의 전략대로만 간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모처럼 운이 착착 들어맞는 것이 느낌이 좋았다.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운전했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운전에 공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십여분이 흘렀을 때, 조수석에 우두커니 앉아 계시던 검정관님이 그래도 20km 이상으로는 밟아야 할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하셨다. 조금만 힘 조절을 못해도 금방 30km를 초과할 것만 같아 이 덜덜 떨렸지만, 어쩔 수 없이 엑셀을 소심하게 눌렀다 뗐다를 반복하며 22, 23km 언저리를 유지했다. 검정관님 입장에서는 답답할 일이겠지만 내가 느끼는 체감 속도는 이미 100km 이상이었다.


길을 잃지 않고 큰 실수 없이 천천히 코스를 돌아 드디어 운전학원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100m 전방에서 좌회전만 하면 끝이다. 여기서 미친 허튼짓을 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합격하겠다는 확신에 내 입꼬리와 광대가 슬금슬금 상승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가 해낸 것인가? '비록 눈물은 많이 흘렸지만 멋진 도전이었다'라는 독백으로 운전면허 도전기의 막을 내리려던 순간, 검정관님이 공포영화에 나올 것 같은  나직한 어투로 대사를 치셨다.


"지금 좌회전 차선에 들어와 있는 거 아시죠"

"네?!"


또다시 장르가 스릴러로 바뀌었다. 스릴러 영화의 묘미는 역시 반전이다.


"지금 직진해야 되는 데 왜 좌회전 차선으로 들어왔어요. 뒤에 좌회전 차량이 없어서 망정이지... 에휴..."


검정관님의 짙은 한숨은 내 실수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함축적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누가 뒤통수에 탄산수를 들이부은 듯 알싸한 느낌이 퍼졌다. 맞다. 직진을 해야 했다. 나는 지금 왜 굳이 차선 변경까지 해가며 좌회전 차선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에이 그래 봤자 10점 정도 감점됐겠지.


마지막 주차를 마치고 최종 점수를 기다리는 오디션 참가자처럼 결과를 기다렸다. 흘끔 검정관님의 표정을 살폈다. 채점관 매뉴얼에 포커페이스 유지하기 항목이 있기라도 한 건지 검정관님은 도통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얼굴로 점수 태블릿의 버튼을 누르고 계셨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검정관님의 손길에서 날 선 감정이 느껴졌다.


검정관님 손가락들 사이로 태블릿 화면에 뜬 단어가 보였다.


'합....?... 불? 불..... 불합격?  설마...'


내 말초 신경이 중력을 거슬러 일제히 기립하는 것 같았다.

 

"불합격이에요"


그 한마디로 싸한 예감은 가혹한 현실이 되었다.


"네? 며... 몇 점인데요?"

"36점"

"네?...... 아.. 아니.. 왜요?"


터무니없는 점수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왜 그렇게 느리게 가냐고! 내가 몇 번이나 속도 올리라고 말했는데!"


점수에 놀라고 검정관님의 반말 섞인 짜증에 또 한 번 놀랐다. 운전에 초집중하느라 몰랐는데 검정관님은 화가 많이 나 계셨다. 검정관님은 오랫동안 참아왔던 울분을 쏟아 내듯이 내가 왜 36점밖에 못 받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숨도 안 쉬고 다다다다 귀에 때려 박는 랩으로 읊어 주셨다. 피드백이라기보다는 호통에 가까웠다.


내용인즉슨 내가 너무 느리게 차선 변경을 해서 뒤차의 진로를 방해했고 안 기다려도 되는 신호를 지켰으며 잘못된 차선에 들어와서 잠재적 뒤차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것이었다. 검정관님의 채점표에는 펜으로 여기저기 부지런히 체크해놓은 흔적이 보였다. 주행시험 내내 별말씀이 없으셔서 지적할 게 없는가 보다 했는데 너무 큰 오산이었던 것이다. 내가 느리게 운전하면서 시간을 넉넉히 제공한 것이 오히려 사소한 감점 요소까지 야무지게 찾아 기록할 수 있었던 빌미가 되었을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천천히 운전하는 것이 불합격 사유란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오늘 시험을 본 A코스는 대부분 제한속도 30km의 구간이었고 나는 20km 이상은 계속 유지하며 갔다. 구간을 감안했을 때 내가 피해를 끼칠 만큼 느리게 갔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저기... 강사님! 그러면 속도는 어느 정도로 맞춰서 가야 되는 건가요?"

"시속 27, 28킬로 정도는 유지해야지!"


그렇게 간당간당한 오차로 운전하라고? 그러다 순간적으로 30킬로를 훅 초과해버리면? 아 어렵다 어려워. 누가 운전시험을 쉽다고 했는가? 그건 허세 아니면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망각한 헛소리다. 운전은 어렵다. 예상했던 대로 너무너무 어렵다.


오늘은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 눈물샘에서는 이미 맑은 물이 퐁퐁 솟아 나오고 있었다.

이번 눈물 버튼은 검정관님의 호통이었다. 떨어져서 속상해 죽겠는데 왜 나한테 짜증을?


집으로 돌아갈 때도 운전학원 셔틀을 탔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그 차에는 나 밖에 없었다.

파이팅까지 해주셨는데, 기사님 얼굴 보기가 민망해서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맨 뒷좌석에 앉았다.


코끝과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멍하니 창 밖의 자동차들을 바라봤다. 다들 운전을 참 잘하는구나. 내 눈에는 아슬아슬해 보이는 데 그 어떤 차도 사고를 내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질서와 규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숙련된 감과 호흡이었다. 나도 이 대열에 낄 수 있는 날이 올까. 그게 언제일까.

 

한참 상념에 잠겨 있는 기사님이 말을 걸어오셨다.


"어? 혹시.... 아까 올 때 셔틀 탔던 그분인가?"

"(아 젠장)... 네...."  

"오늘 시험 친다 그랬죠? 합격했어요?"


다정한 기사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구멍으로 뜨거운 덩어리가 몽글거리며 올라왔다. 기사님의 목소리 추위에 오들오들 떨던 몸을 감싸주는 담요처럼, 시린 손에 쥐어 주는 따뜻한 차 한잔처럼 따스해서 눈물이 났다. 눈물방울들이 주책없이 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 떨어졌어요..."

"아이고... 허허.."


나도 눈물이 맺힌 채로 기사님이랑 같이 웃었다.


"나중에 아빠나 남자 친구한테 부탁해서 실제로 코스를 돌아보세요. 그거 영상만 봐서는 안돼요. 학생이 조수석에 앉아서 직접 길을 알려주라고.. 그러면 금방 감이 오니까....  오늘 뭐.. 수고했네요. 허허"


아빠? 남자 친구? 그 와중에 기사님이 날 학생으로 착각한 것이 좋아서 입술이 씰룩거렸다. 마스크를 쓰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아줌마로는 안 보인다는 뜻 아닌가. 진짜 내가 앳되어 보이는지 폰 액정을 거울 삼아 내 얼굴을 살폈다. 촉촉해진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운전면허를 떨어졌다는 사실을 잊었다. 기사님은 여러 모로 내게 힐링이었다. 덕분에 기분 나쁜 스릴러가 될 뻔한 나의 하루는 꽤 훈훈한 성장 영화 비스무리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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