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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둥바둥 김대리 Nov 21. 2024

[부동산2편]차곡차곡 월급모아 11억 서울집

[#3]그대의 퇴사 고민은 안녕하신가요?



어떤이는 앉은 자리에서 '0원'을 투자해서 '4억'을 벌고, 어떤이는 앉은자리에서 '3억원' 투자해서 '몇천만원'을 날린다.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방법으로 어디를 선택했느냐로 결과가 이렇게 극명하게 나뉘는게 부동산시장이다. 불행히도 나는 권장하지 않는 방법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후자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탓에 코묻은 나의 생돈을 앉은 자리에서 날려먹었다.






 잘되는게 배가 아픈걸 어떻게?


중학교 시절 공부에 욕심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당시 키가 큰편이었기에 뒤에서 두번째 자리에 앉았었고,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는 소위 말하는 엄친아 였다. 키도 크고 축구도 잘하고 공부는 전교 1,2등을 앞다투는 그런애 였다. 이해가 안되었던 점은 수업도 안듣고, 쉬는시간이면 엎어져 자기만 했다는 것이다. 나는 죽어라 단어를 외우고 쉬는시간에도 공부를 할만큼 열정적이었지만, 그 구를 넘어서기는 역부족이었다.



훗날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친구의 부모님과 우리부모님간의 학부모 교류를 통해 전달 받은 사실은, 집에서 거의 매일 밤을 세워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위 저녁형 인간이라 늦은밤 집중이 잘되기 때문에 잠을 자지않고 공부를 하여 학교를 가고, 막상 학교에서는 잠을 보충한다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노력과 치열함이 있었던 것이다.



동기형과의 부동산 관련된 짧은 통화는 나에게 굉장한 좌절감과 열등감을 주었다. 아주 친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심은 어쩔수 없었고, 그 뒤로 연락이 뜸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가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았기에 관계가 소원해 진것이다. 내가 못난 탓이요, 사촌이 잘되면 배아픈 꼴이었다. 하지만 중학교시절 전교 1등 친구가 남몰래 공부를 열심히 하였듯, 아무생각도 없이 회사생활을 하며 월급도 모으지 않고 놀기만 한것처럼 보인 동기형도 남모를 노력을 했을지 모를일 이었다.



손해 보고 팔자!



평택의 집은 1,000만원이라는 웃돈을 주고 샀기에 손해 보고 팔때 충격이 더 크게 와닿았다. 게다가 인생 첫 새아파트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슴 깊이 세기고자 입주 청소도 셀프로 할만큼 애정이 가득 담긴 집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내가 어짜피 살집인데' 라고 위안을 하기에는 계속 떨어져 가는 집값을 가만히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견딜 자신이 없었다. 결국 평택집은 싼값에 다른 사람손으로 넘어가고 그와 동시에 나는 다른 지역의 아파트를 또 구매하였다. 또 다른 시련의 서막이 올라가고 있엇다.





평택아파트에 살면서 그리고 손해보고 팔면서 느낀점은 두가지 였다. 돈이 있더라도 은행의 대출을 이용해서 집을 사야한다는 점과 지역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두번째로 선택한 집은 대출과 함께 약 7억정도의 금액이 필요하였고, 지역은 서울과 근접해 있는 경기도 '광명' 이었다.



인생 처음의 대출이었다. 발목에 족쇄를 누가 채운것처럼 발걸음이 무겁다 못해 어깨도 무거워진 것 같았다. 매달 값아야할 원금보다 은행에 내야할 아까운 생돈이 눈에 먼저 들어왔고, 그렇게 그돈이 아까울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기형의 사례를 타산지석 삼아 대출은 '내인생의 좀도둑'같은 존재가 아닌 '레버리지' 라고 되뇌였다.



평택아파트를 살당시 현금 3억과 함께 대출을 이용했다면 서울에 어떤 아파트를 살수 있었을까 하고 복기를 한적이 있다. 국토부 실거래가 시스템에 과거 거래 금액이 있으니 복귀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당시 대출규제도 강하지 않았던 터라 서울 내에서도 살수 있는 아파트가 상당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현재 거래되는 금액을 보았다. 망치로 정신을 얻어 맞은마냥 두눈을 보고도 믿기지 않는 거래 금액이었다. 평택아파트를 사지 않고 대출 레버리지를 이용했다면 최소 5억, 아니 많게는 8억까지 벌수 있었던 그런 지역의 아파트가 있었던 것이다.



또 망조의 조짐이 보인다.
내가 거래한 금액이 또 최고가 였다.


이런 복기과정과 반성이 있었음에도 정작 광명아파트를 살때는 그만큼의 신중함과 탐색을 통해 아파트를 사지 못한것 같다. 결국 내가 산 금액은 평택 아파트살때와 마찬가지로 산 꼭대기(최고가)를 찍고, 그 이후로 내리막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무엇이 문제일까?'



약 7억이라는 나의 최고가 거래금액이 실거래가 시스템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고, 몇일 간격으로 6억 1,000만원이 그 다음줄에 있는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부동산계의 똥손이다', '난 운이 없다.', '공부를 더 했어야 한다.' 등등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다 든다. 평택때와는 달리 대출을 받은 상황에다가 거래 금액도 커진만큼 낙폭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컸다. 몇년치의 세후 연봉이 날라가 버린것이다.



나름 로얄층에 로얄동 그리고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구매하였는데, 이론과 실전은 다른것인지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래, 6억 1,000만원은 저층이라서 저렇게 낮은 금액으로 거래된 것일꺼야' 라고 하기에는 그 이후 로얄층 로얄동임에도 낮은금액으로 한동안 계속 거래가 되었다. 이쯤 되니 '나는 호구다' 라고 이마에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고 있는 것 같앗다.



상황은 이쯤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육탄전으로 나를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혔다면, 그다음은 정신적으로 공격을 받을 차례가 왔다. 광명아파트를 구매할 당시 인접해 있던 목동아파트를 사라는 처가댁의 조언이 있었음에도 오래된 아파트(40년 이상된 복도식 아파트) 에 평수도 20평도 안되서 도저히 살수 없다는 핑계로 광명아파트를 선택한 터였다. 재건축이라는 투자개념이 없었기에 어찌보면 당장 눈에 보이는 허름함에 눈을 돌려 광명아파트를 선택한건 당연했다.



광명아파트를 구매할 당시 처가댁의 조언도 있었기에 임장은 마지못해 다녀왔었고, 광명아파트를 살돈으로 살수 있는 금액대의 매물위주로 둘러보았었다. 하지만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를 보면 볼수록 도저히 살수가 없다는 생각이 굳어져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광명아파트에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그뒤로 목동 아파트는 '사자에 날개' 를 달고 훨훨 웃으며 날아가 버렸다. 평택때와의 데자뷰인것인지 내가 선택한 아파트는 떨어지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아파트는 급상승하는 배아픈 상황이 또 벌어진 것이다.



그 순간 나의 신경을 긁는 일이 이어서 벌어지게 되었는데, 바로 처제 식구들이다. 아내와 한살 터울인 처제는 상대적으로 사회생활을 늦게 시작했고, 처제 남편역시 그러했던지라 우리와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 모으지 못한 상태로 결혼을 하였다. 나와 아내는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서로의 성향이 비슷해서 결혼한 만큼 아내도 근검절약이 몸에 베어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광명아파트를 구매할 당시 처제 식구도 여기저기 돈을 끌어다 서울에 집을 샀고,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매한 경기도 광명 아파트 7억보다 훨씬 못미치는 금액으로 서울 자가를 마련하였다.



'형님. 서울에 집을 사셨어야죠!'



이 한마디가 얼마나 꼴사납게 여겨지던지 하마터면 입밖으로 험한말이 나갈뻔 한걸 꾹 참았다. 나이도 어리고, 사회 경력도 짧고, 모은 자산도 없는 어린 친구가 감히 형님에게 이래라 저래라 조언을 하는것 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생각한 나 자신도 속좁은 인간임이 틀림 없었지만, 평택의 투자실패 아픔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터라 마음상태가 삐딱한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문득 그들의 집값을 보았다.



9억



그리고 호가는 10억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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