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 되기 힘들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관계가 늘어나면서 여자로서 하나의 로망이 있다면 좋은 선배가 되고 싶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살면서 맺게 되는 모든 관계들 속에서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좋은 여자 선배들은 언제나 남편을 따라 타 지역으로 가버리거나,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해 곧잘 관계가 끊어지곤 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 회사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해도 어쨌거나 버텨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한 사람의 좋은 선배가 있어 버틸 수 있다고들 했다. 언제부턴가 내가 회사에서 잘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남녀불문 믿을만한 나의 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여자로서는 오죽하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좋은 선배가 되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순간마다 내게 도움이 됐던 좋은 선배들을 떠올려보니 좋은 선배란 건 단순히 성품이 좋거나 나를 잘 위로해주는 사람이기보단, 악습들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생각에 단단한 연대를 표해준 사람들이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것만으로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언젠가 예능프로에 출연한 모델 한혜진의 대화를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다. 후배들에게 줄 음식을 준비하며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지 말까 봐. 내가 만들면 먹기 싫어도 먹어야 되잖아” 또 다른 예능프로에서 한자리에 모인 후배 모델들과 “모델계의 악습을 끊은 언니들”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군기를 잡는다는 이유로 이유 없이 꼬투리를 잡고,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들로 수시로 집합시키는 등의 모델계에 만연한 악습을 한혜진과 동료 모델 장윤주, 송경아 3인방이 없앴다고 했다. 이에 다른 패널들은 악습을 끊은 사람의 이름을 꼭 언급해줘야 한다며 “박수받아 마땅한 모델 선배 3인방”이라고 표현했다. “윤주 언니랑 경아 언니가 악습을 없앤 거죠!”라고 말하는 한혜진을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듦과 동시에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는 건 어렵지만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만 했지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상황과 디테일은 달라도 나쁜 사람에 대한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연말연시 미디어에서 자주 등장하는 질문인 “싫은 유형의 직장상사는?”이라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우리의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범위 내의 대답이 들려온다. 내가 흔히 겪었던 나쁜 선배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예의와 나이, 직급 등을 악용하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고 직급이 낮은 사람은 나보다 약자라는 의미가 아님에도 약자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상하관계가 유난히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의 대학시절, 한 선배는 이런 말을 했다. “넌 후배로서는 영 별로야. 선배 말을 안 들어. 첫째라면서? 선배들이 바라는 좋은 동생, 뭔지 모르겠어?” 그 이후로도 비슷한 류의 말을 회사에서 들은 적이 있다. 서울살이 0.6년 차, 첫 직장에서였다. “나 이 업계에서 10년 차야. 그럼 알아서 굴어야지. 막내면 막내답게 사무실 동료들 커피도 타놓고 컵도 씻어놓고 그래야지. 넌 눈치가 없는 거야, 성격이 별로인 거야?” 나는 그 회사에서 2주 만에 나왔다. 한 업계에서 15년을 굴러먹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만약 경험이 조금 적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상대를 약자 취급할 권리를 누리고 싶다면 약자를 보호하는 의무도 따라야 한다. 선배라는 단순한 이유로 후배를 통제하려 드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로는 어떤 후배에게도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몇 년 전 할아버지들이 유럽여행을 떠나는 예능프로 [꽃보다 할아버지]에서 이순재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었다.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서 어른 행세하고 대우받으려고 하면 진짜 늙어버리는 거야” 가끔 후배들에게 깍듯한 선배 대접을 받고 나면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이를 먹는다고 대화의 여지가 사라지는 게 싫다. 나이가 많건 적건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이의 아래위와는 상관없이 적어도 나쁜 사람이 되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관계를 가지면 적어도 좋은 선배나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서 좋다. 이것이 내가 후배나 막내들에게 친절한 이유이고, 절대로 윗사람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는 이유다. 동생이 둘인 내 생각에 정말 누군가가 동생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너 동생처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같은 말 따윈 필요 없다. 말없이 그냥 도와주면 된다. 좋은 선배가 되어주는 현실적인 방법은 나쁜 선배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매뉴얼 같은 어떤 법칙들이 선후배 관계의 오랜 전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악습이라면 없어져야 하며,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같은 악습을 반복하지는 말아야지.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린 모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쓰는 아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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