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도르 Feb 18. 2021

여기서 자전거 타시면 안 됩니다

불만이 아니라 불편입니다

글쓰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출퇴근이 빠른 편이라 모임이 있는 시간까지 두 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모임 장소인 홍대 주변까지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10분 거리라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당산에서 홍대입구역까지 걸어가려면 양화대교를 건너야 하는데, 선유도공원 합정 등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이 모두 연결된 양화대교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양화대교에서 보는 노을은 서울에 사는 맛을 느끼게 해주는 몇 안 되는 아름다운 풍경인걸 알기에 오랜만에 해 질 녘의 양화대교를 걸을 수 있음에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양화대교 위를 걸으면 눈에 띄는 문구를 몇 걸음마다 한 번씩 보게 되는데 그건 “보행자 우선 자전거 탑승 금지” ,“자전거를 끌고 가세요”라는 문구이다. 두 명이 나란히 걷기에도 좁은 양화대교 위를 걸을 때마다 차보다 빠른 속도로 쌩쌩 달리는 자전거 때문에 휘청였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 그날은 빠른 속도의 자전거를 급하게 피해 좁은 길을 양보해주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양화대교를 건너는 동안 정확히 21대의 자전거를 보았지만 단 한 명의 외국인만이 자전거를 끌고 갔을 뿐 남녀노소를 막론한 나머지 20명은 자전거를 타고 그 좁은 양화대교 위를 위험천만하게 쌩쌩 달렸다. 서울시 공공자전거인 따릉이를 이용하는 유저가 늘어나면서 몇 년 전 양화대교 위의 무법자의 수보다 훨씬 늘은 숫자였다. “비켜주세요!”라고 소리치는 사람, 자전거의 경적을 계속해서 울리는 사람, “아가씨 비켜주시면 감사하지요”라고 말하는 사람, 위험하게 나를 스쳐가는 사람 등 스무 명의 사람들은 나를 지나쳐가야 했기에 내 등 뒤에서 각종 방법으로 길에서 비켜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 스무 명의 사람에게 나는 스무 번 이런 말을 했다. “여기서 자전거 타시면 안 돼요. 보행자가 위험해요! 자전거 탑승 금지, 보행자 우선, 글씨 안 보이세요?” 평소엔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훌륭한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시간 양화대교 위에선 무법자나 다름없는 위험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려나 주고 싶었다. 그러나 몇 명만이 머쓱해하는 기색을 보일 뿐 단 한 사람도 내 말을 듣고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았다. 젊은 남자 한 명은 “나도 알아요!”라고 소리치며 도망가 버렸고 한 아저씨는 자전거에 오른 채 나에게 “아가씨가 피하면 되잖아. 되게 예민하네”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는 쌩 사라졌다. 시민의식이나 준법정신을 논하기 이전에 나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분 좋게 시작한 산책은 스무 명의 무법자들 덕분에 뾰족해진 기분으로 마무리됐다. 다음날 출근을 해 여담으로 양화대교 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의 반응이 새삼 놀라웠다. “자전거에 치인적 있어?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겁도 없다. 그걸 또 말하고 그래. 말해봐야 네입만 아프지”, “참 유별나시네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잘 없는데” 잘했다는 칭찬까지야 바라지도 않았지만 예민하고 유별난 사람이 되는 게 왠지 억울했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계속 말하다 보면 한 명쯤은 듣지 않을까? 잘못된 행동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한테 알려라도 주고 싶어. 그러시면 안 된다고. 사실 거기서 자전거 타면 안 된다는 거 스무 명은 다 알고 있었을걸? 모를 수가 없어. 대문짝만 한 글씨가 몇 걸음마다 있는데. 나만 빨리 지나가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타지 말라는 곳에서 더 빨리 쌩쌩 달렸겠지. 근데 그게 더 나쁜 거 아냐? 잘못된 거 알면서도 하는 거,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거,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을 오히려 예민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거”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됐다는 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인다.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남녀차별 문제에 대해 불편하다는 말을 하면 “차별당해서 피해본 적 있어? 유독 이문제에 예민하네”라고 말한다. 10번 중 9번의 약속을 취소하는 사람에게 다음부턴 더 신중하게 약속을 잡아달라고 말하면 “까칠하게 왜 그래”라고 하고, 한 달 전부터 예약된 강의 당일 10분 전 노쇼(No-Show) 통보를 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어야죠”라고 하면 인색한 사람 취급을 한다. 몸이 아프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약속 장소까지 간 나의 노력과, 강의를 위한 자료 준비에 걸린 나의 이틀은 누구에게 보상받는단 말인가. 그 강의만 아니면 밀린 원고를 10페이지쯤은 완성했을 나의 시간은 또 어떤가. 그들에겐 타인의 시간과,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그렇게 하찮다는 말일까.


나에게 예민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불편을 불편이라고,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을 예민해서 그렇다고 뭉뚱그려버리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모두가 알면서도 함구하는 불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예민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위협하고 있다”는 신호이며 “당신은 법규를 위반하고 있습니다”혹은 “당신으로 인해 누군가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이 잘못한 것인데도, 불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일이 생겨도 된다는 무례한 말과 같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도 있듯 속으론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편을 말하지 않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들이 얄미울 때가 많다. 작년, 해성처럼 등장한 우주대스타 펭수는 이런 말을 했다.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군요? 그럼 그 사람들이 문제예요. 부정적인 사람들은 도움이 안 되니 긍정적인 사람과 얘기하세요” 불편을 모른척하고 함구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니라 그냥 예의 없는 행동을 묵인하고 동조하는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 길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예의 없고 무례한 행동을 침묵으로 동조하는 부정적인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잘못됐다고, 불편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살 순 없다. 나도 때론 불편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될 용기가 나지 않아,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눈 질끈 감고 입을 다물고야 마는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오히려 불편한 사람으로 취급해버리는 분위기는 이렇게 수많은 겁쟁이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겁쟁이가 많은 세상은 서로 불편한 세상이다. 수많은 겁쟁이들 사이에서 용기 내 불편을 말하는 사람을 예민하고 피곤한 사람 취급할 것이 아니라 그 불편과 무례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혹시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진 않았는지, 혹은 알면서도 내 작은 욕심이나 이기심 때문에 내 무례함을 모른척하진 않았는지.






쓰는 아도르

사진, 글, 캘리그라피 adore
블로그 : http://jwhj0048.blog.me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adore_writing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향해 반짝이는 눈빛만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