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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Apr 18. 2024

엔돌

사울의 운명은 그 자리에 있었다. 

무녀가 아니었다. 사울의 운명을 예언한 것은 그의 기억이었다. 무녀는 그저 한 이미지를 던져주었을 뿐이다. 환영이 사무엘인지 누구인지 무녀는 알지 못했다. 어떤 심상이 떠올랐다는 말에 사울은 단번에 그것이 사무엘일 것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보이지 않는 그 대상을 사울은 하나님처럼 여겼다. 

무녀의 환영은 사울의 환청으로 옮겨갔다. 환청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진부한 소식이었고 이미 예정된 운명의 반복이었다.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 그는 동일한 메시지로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고, 아말렉과의 전쟁 직후 오만했던 그에게 사무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라마로 돌아갔다. 사울에게 정신적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엄밀히 따져보면, 선택받은 자에서 버림받은 자로 전락한 것은 예언자가 선언한 운명 탓이 아니다. 규정된 왕의 규례를 번번히 무시해서였고, 실수가 드러날때마다 변명이 앞서서였다. 

엔돌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지막 자리였다. 한밤에 변복을 하고서 비밀스럽게 무녀를 찾음으로써 그 땅에서 무녀와 신당을 없애버린 왕의 결정을 스스로 번복한 것이다. 굳이 엔돌이 아니어도 침실에서 혹은 집무실에서 사무엘의 경고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어쩌면 사울은 매일 그 말을 곱씹으면서 말의 운명을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괴롭혔던 운명의 말은 우습게도 스스로의 행위로 인해 점점 강화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엔돌을 찾는 그 순간 예언된 그의 운명이 확정되었다. 그가 그 시간을 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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