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교회 순례길을 추억하며 *그림 프리실라 카타콤바 프레스코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몇 달 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충돌이 일어났다. 충돌은 전쟁으로 확산되었고 지금도 수많은 희생자의 울부짖음이 매스컴과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들려온다. 엄청난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온 후라 전쟁의 소식은 '믿는다는 것'에 관한 또 한 번의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순례길엔 문자 혹은 전승으로만 남은 예배와 희생의 유산이 있을 뿐 현실 교회는 어디에도 온전하게 보전된 것이 없었다. 지진과 전쟁으로 무너진 도시에 흩어져 남은 파편들이 전부였다. 결국 어느 교회도 전쟁과 자연재해를 버티진 못했다. 교회를, 신앙공동체를 유일한 피난처로 삼은 이들에게 그 소식은 깊은 무력감과 회의에 빠지게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대범한 믿음은 범속한 신자에게는 그저 카타콤 벽화에 기록된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 그만큼 경이롭지만 현실과는 먼 이상일뿐이다. 교회의 본질인 복음, 그 좋은 소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왜 좋은 소식인가, 고통에서 도무지 벗어날 길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과연 선한가, 불편한 질문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가자지구 전쟁 뉴스를 접할 때면, 과거 '거룩한 진멸'이라 불리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사를 떠올리게 된다. 누구도 살려두어서는 안 되는 자비 없는 파괴, 멸절이 신의 이름으로 실행되었던 전쟁, 그 역사를 읽을 때마다 혹은 누군가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럽다. 그 어떤 전쟁도 죄악이라 생각하는 이에게 '거룩한' 전쟁은 끝없는 혼란을 초래한다. 야훼의 법을 기록한 문서 마지막 즈음에 저자는 짧은 일화 하나를 끼워 두었다. 이스라엘인 어머니와 이집트인 아버지에게서 난 한 남자가 어떤 이스라엘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그와 다투게 되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그 혼혈 남자는 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했고, 그의 언행이 야훼의 율법에 위배되므로 얼마 후 그는 사형에 처해졌다. 그 일이 있고 다시 한번 율법의 재강화가 선포된다.
외국인이든 본국인이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누구든지 사람을 때려 죽게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
골절에는 골절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되받게 될 것이다.
어쩌면 가자지구를 둘러싼 전쟁의 발단이 이 오랜 기록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하였고 이스라엘은 그에 응당한 심판을 실행하였고, 다시 하마스는 "사람을 때려 죽게 한" 이스라엘에 생명으로 보복하고, 끝없는 되갚음의 법이 처음 시행된 그 시점에서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일점일획의 폐기 없이 '성실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들에게 오늘의 전쟁은 주어진 법을 지키는 정당한 행위며 거룩한 수행일 것이다. 믿음으로 내면화된 이 보복 행위를 인류사에서 걷어낼 방도가 없다. 사소한 다툼에서 생명의 심판으로 비화되어 가는 이야기의 결론은 단호하고 간단하다. "명령하신 대로 행했다."
아직도 지진 복구의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 지난 연말 그곳에서 소식을 전해왔다. 학교를 세우고, 집을 짓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서로를 안아 격려하고 눈물짓는 영상이 담겼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시간은 지나가고 이제 산 자의 이야기만 남았다. 거대한 폐허 위에서 뿌리는 산 자의 눈물과 땀의 기록은 풀무불에서 살아남은 이방 청년들의 불굴의 믿음이나 옛 교회터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는 지나간 영화의 복원과는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 특별할 것 없는 하지만 진심 어린 형제애, 단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