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흔적들

에필로그

by 미정의 서

쓰기의 역사에서도 태고의 미메시스 능력은 언어와 문자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행위의 직접적 동인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그러니 쓰기의 궤적을 쫓아가는 여정에 자연스레 언어와 문자가 기대어 있는 감각의 극단들을 연관시켜 보는 벤야민적 미메시스의 모티프들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십 여편의 짧은 이야기로 엮어 본 이 쓰기의 흔적들이 바로 그런 관찰의 기록인 셈이다. 유사성에의 본성이 일으키는 언어-문자-쓰기의 연관은 인간 행위의 본성이라 할 삼위 구조 속에 각자 위치를 갖는다. 요컨대 아이디어로서의 언어와 육화 된 문자, 양자를 매개하는 창조적 힘으로서의 쓰기는 언제나 삼위일체적으로 연동한다. 장구한 문자사의 기록들이 이러한 연관의 확실한 보증이 되어 준다. 비가시적 음성에 쓰기의 기술이 어떻게 물성을 입히고 또 자유롭게 이미지 변환을 꾀할 수 있는지 알파벳의 선조들은 무수한 예술가들의 끝 모를 실험의 선구가 되었다. 직접적 유사성에 근접한 사물 문자들 또한 음성적 자질의 간섭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순 없었기에 쓰기 행위 그 자체에서 일종의 성격 내지 소리가 지녔던 신비적 힘을 읽어내고자 했다. 거기에 문자의 연대기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정음이 벤야민의 비감각적 유사성에 가장 근접한 것은, 소리와 형상을 직접적으로 맞서 놓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자모의 소리 속성은 우주적 형상과 직접 대응하고 이 감각의 연관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시, 쓰기의 현재적 기술은 형상적인 것으로부터 음성적인 것으로 환원하려 한다. 전통적 쓰기에서 필사의 영혼을 인용하듯 텍스트-사운드 전환 기술(TTS)이 재현된 소리에 성격을 입힌다. 그렇게 우리는 쓰기의 또 다른 중심으로 이동 중이다. 끝없이 호변하는 음양의 역장이 언어와 문자 그리고 쓰기의 연관에서 읽히는 것도 사뭇 흥미롭지만, 이들 연관의 항이 재배열될 때마다 새롭게 그려지는 쓰기의 경계들도 별스런 관심과 탐구를 멈출 수 없게 한다. 쓰기의 흔적들에서 건져 올린 미메시스적 모티프들을 가지고서 미지의 쓰기를 예감하고 실험해 보는 것, 그것이 이 쓰기의 다음 장이 될 것 같다. 물론 예측 가능한 최신의 기술과 경계들은, 역사의 진정한 이미지가 그러하듯, 가장 오래된 것 곧 태고의 것과 또다시 조우하게 될 테다.

모더니티의 얼굴은 까마득한 태고의 시선으로 우리를 전율하게 만든다.
_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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