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 개념의 변용 #3
극단들은 벤야민 사유의 나침반과 같다. 그것은 벤야민이 제기한 하나의 개념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텍스트 전체가 이 극단들의 성좌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극단들의 사유를 위한 방법론적 모델로서 트락타트의 형식을 제시한다. 그리고 "우회로서의 재현"이 그것의 "방법적 성격"이라고 덧붙였다.
의도의 부단한 진행을 포기하는 것이 트락타트의 제일의 특징이다. 사유는 끈기 있게 항상 새로이 시작하며, 사태 자체로 집요하게 돌아간다. 이러한 부단한 숨고르기가 정관의 가장 고유한 존재형태이다._발터 벤야민, <인식비판론 서론>
이렇게 단속적이고 불규칙한 사유의 리듬은 기존의 철학적 방법론과는 다른 인식의 길을 조명해준다. 연역적 체계로서의 사유 방법을 포기하고 동일성의 원칙 아래 모든 현상적 차이를 배제하는 독단을 멈출 때 진리에로의 우회로는 시작된다. 벤야민은 이질적이고 개별적인 현상 그 자체로 우리의 시선을 옮길 때 오히려 파편화된 그 현상들로부터 진실한 진리에의 도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니 상이함 혹은 극단의 것이야말로 사물 그 자체의 개별성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객관적이고 잠재적인 배열"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의 열쇠인 것이다. 성좌의 이미지는 바로 이 극단들의 공명에 관한 벤야민의 도식이다. 모든 존재의 양면성을 섣부르게 봉합하려 하지 않고 그 힘의 양립을 보장하면서 사물들 사이에 들려오는 불연속적 반향음에 귀 기울이고 또 그 연관을 형상화하는 이 같은 사유 기법이야말로 수용과 자발성이라는 점에서, 언어와 마찬가지로, 미메시스적이다.
물론 동양의 사유체계에서는 벤야민이 살폈던 극단들의 공속이 마치 숨쉬기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기에 우주의 발생부터 문자의 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를 상대적인 것들의 "대대待對"로 이해해왔다. 어쩌면 벤야민에게 중국적인 것은 그가 성찰하고자 했던 유사성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의 성좌적 이미지가 동양적 전통, 무엇보다 쓰기로 재현되는 양가적 힘의 역학을 미메시스적으로 조명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질적인 것들의 유사성, 극단들의 성좌로도 번역 가능한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을 탐색하면서 기술적으로 가장 용이하게 적응시킬 수 있었던 장르가 다름 아닌 동양의 서書였다. 획의 음양은 극단들을 배치하는 이 독특한 사유 방법론의 신체적 흔적이다. 노자의 이름(名可名非常名)이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의 양가 관계로 배열되지만 곧 이 차이(徼)가 묘합(妙)하는 이중나선의 궤를 그리듯 획의 농밀, 고저, 장단의 상이한 기운과 형상 역시 상보적으로 작동하며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룬다.
붓의 흔적은 현시적이고 즉각적이다. 이 현시성에 몰두했던 앙리 미쇼는 "새로운 언어"의 탐색을 위해 동양의 서예에 빠져 들었고, 이 쓰기의 운동이 생성하는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단어에 고정된 문자를 해방시키고 언어가 지녔던 본래적 직접성에 다다르고자 하였다.
나는 빠른 속도로 그리고 자신들의 리듬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이러한 형태들로 가득찬 움직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리듬은 때로는 한 페이지를 압도하고 때로는 몇 페이지에 걸쳐 계속되어 상징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생동감은 더욱 증가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대상에 집착하는 단어들로부터 나를 풀어주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는 그들을 언어와는 등을 돌린 새로운 언어, 해방자 des liberateurs로 보게 되었다._앙리 미쇼
광기의 시대, 시인은 언어 전통과 기호적인 것으로부터 탈주하여 해방자로서의 언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단한 기호의 벽을 뚫고 모호하고 양가적인 것들의 충돌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케 한다. 일회적이고 극단적인 현상들이 공존하며 순간적으로 드러내는 연관의 형상을 "성좌로서의 이념"이라 한다면, 미쇼가 탐구했던 언어의 세계도 분명 성좌적인 것과 유사해 보인다. 과다 명명된 언어를 다시 태초의 상태로 되돌리고자 생성적 쓰기의 힘을 빌린 시인에게 쓰기의 몸짓은 혼돈으로부터 빛과 어둠이 나뉘고 각양각색의 만물이 생성되던 창조의 언어적 본성 그 자체였다. 물론 그 흔적은 기호적인 방식으로는 전혀 해독되지 않는다. 시인의 쓰기는 처음부터 "씌여지지 않은 것"들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쇼의 움직임 mouvement으로 접근하려 했던 언어의 심연은 동시대 추상화가 이응노의 쓰기에서도 엿보인다. 다만 화가의 필묵은 전통의 경계를 넘어 다양하고 생소한 재료들과의 결합, 그리고 쓰기와 그리기, 붙이고 긁는 행위로 그 변이형들을 무한하게 생성하면서 성좌적 공명을 중층적으로 확장해간다. 더욱이 초기 콜라주 형식은 쓰기 행위에 관한 본래적 이미지를 탐색하게 하는데, 종이에 쓰기라는 전형성에서 탈피하여 "종이로 그린 서체"로 해석되었던 일련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마치 고대 벽화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그의 쓰기는 운필에 의한 생동감과 파피에 꼴레에 의한 재료적 구성이 결합되어 동시대 문자 추상과는 다소 이질적인 감성으로 다가온다. 전통적인 획과 여백의 상호 교차보다는 오히려 해체와 구성의 상응 관계가 이 쓰기를 기술하기에 더 적절한 개념일 듯하다. 필묵의 흔적들을 뜯고 붙이는 행위뿐만 아니라 상이한 문자의 획을 해체하고 새롭게 문자적 구성을 시도했던 작업들 역시 극단의 성좌로 읽힐 만하다.
문득 벤야민이 주목했던 한 단어, entfaltet(전개)에 담긴 의미론적 병치가 떠오른다. 카프카적 서사를 고찰하는 데 사용되었던 "전개된 [펼쳐진] 우화(entfaltete Parabel)"의 이 수식어는 단어 그 자체에 이중적 의미가 내재해 있다. 그것은 "편편하게 펼쳐질 때"와 "봉오리가 꽃으로 개화할 때"를 모두 지시한다. 이야기의 의미를 편편하게 펼쳐내는 것과 기다림 끝에 순간적으로 터뜨린 꽃망울처럼 전개되는 이야기의 차이를 벤야민은 이 한 단어로 응축해내었다. 그리고 그 극단의 "전개"가 이응노의 쓰기를 카프카적 제스처로 조명하게 한다. 벤야민은 카프카의 작품 전체를 제스처들의 암호로 보았고 그 제스처는 통상적인 상징체계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맥락 속에 "거듭" 배치됨으로써 "끝 모를 성찰들"을 펼쳐내리라 예견하였다. 이응노의 제스처 역시 지극히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것에 속한 듯하나, 문자들의 경계로부터 탈주한 획들은 끊임없이 생소하고 낯선 조합을 이루며 변형되고 쓰기의 규범-소재로부터 행위에 이르기까지-에서 누락된 것들로 쓰기를 구성한다. 고정되거나 완결된 형태를 지니지 않은 이 쓰기의 제스처는 아무 의미 없는 아이의 옹알이를 닮은 듯하다. 그래서 태초의 언어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언어와 문자로 전이된 태고의 미메시스 능력을 추적하던 벤야민의 시선이 카프카적 서사를 흥미롭게 비춰내듯 미쇼와 고암이 남긴 쓰기의 흔적에서도 그가 주목한 "미메시스적인 것과 기호적인 것의 융해 과정"을 발굴해 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