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의 미메시스적 계기들

미메시스 개념의 변용 #2

by 미정의 서

사혁은 회화의 궁극적 목표를 기운생동에 두었고, 장언원은 이를 그림 그리는 제1 법으로 다루었다. 동기창 역시 화가의 육법 가운데 첫째가 기운생동이라 하였고, 유희재의 서법에서도 "골과 기의 두 글자를 통솔"하는 것이 쓰기의 요체라 하였다. 이 필획의 형상화에 작용하는 기운은 일차적으로 대상에 내재한 생명력에 기인한다. 동시에 그것은 대상을 옮기거나 전달하는 자의 타고난 천성이기도 하다. 특히 당인이나 동기창은 이 선천적 기운을 강조하였는데, 뛰어난 기교나 후천적인 학습으로도 그 천성의 "교묘한 바"에 다다르기가 쉽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이렇듯 동양의 쓰기 혹은 그리기에서는 대상과 자신의 기운을 온전히 체득하고 발현하는 데 궁극적 관심을 두어왔다. "서구적 미메시스의 부재", 프랑수아 줄리앙은 동양적 필획이 지닌 기운의 특징을 이렇게 기술한다. 하지만 벤야민적 미메시스의 길을 충실하게 걷다 보면 오히려 동양적인 것과 미메시스적인 것의 교각이 더 선명하게 체득된다. 서화일체, 기운생동의 전통적 이념으로 보아도 벤야민의 미메시스는 그리 낯설지가 않다. 고요한 정관 속에서 타자성을 수용하는 방식은 화가가 산수의 정신을 파악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곧 사물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수용이 이 동양의 화자가 대상을 마음에 들이는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언의 사물이 형상화될 때 당연히 그것은 비생산적 모방이 아닌 대상의 순수성, 직접성을 현시하는 행위가 된다.

가로획은 천리에 진을 친 구름과 같다. 보일 듯 말 듯 은은하지만 실제로는 형체가 있는 것이다. 점획은 높은 봉우리에서 돌이 떨어지는 형세와 같다. 돌들이 서로 부딪혀 소리를 내는데 실제로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_위부인, <필진도>


그러고 보면 기운의 체득과 표현에 관여하는 소통 과정에는 일련의 미메시스적 계기들이 있는 듯하다. 최초에는 작가의 마음으로 대상을 받아들이고, 이어 그것은 신체 혹은 구체적 매체를 통해 기득한 기운을 외부로 표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종국엔 독자의 위치에서 형상화된 기운에 공감하는 과정이 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사혁이 그의 <고화품록> 서문에서 처음 기운생동을 언급하였을 때 그 뜻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은 탓에 시대와 이론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운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나머지 다섯 가지 법이 구체적인 제작의 원리라면 기운생동은 그 개념이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일관된 정의에 도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운용의 기록을 탐구하다 보면 곳곳에서 벤야민이 구상했던 미메시스와의 유비와 마주치게 된다.

제1의 계기. 주지 한대로 대상의 골기까지 온전히 담아내려는 기운의 운동은 사물의 수용에서 시작된다. 이를 벤야민의 언어로 번역한다면, 사물이 건네는 "말없는 말"을 수용함으로써 그 사물에 조응하고 그것이 유사성을 만들어내는 재능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 고대 제의에서 사물에 깃든 신령한 정신을 그 자신 속에 온전히 담고자 했던 무희들의 동작처럼, 쓰기 행위 역시 그러한 유사성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두 개의 돌판에 신의 말씀이 새겨질 때 그리고 짐승의 뼈에 복사(卜辭)를 새길 때, 이 모두가 단순한 기호의 조합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유사성의 행위였다. 신의 말씀이 사물들 '속에서' 전달되듯 기록된 문자 '속에서' 사물의 정신 곧 의도된 의미가 아니라 사물이 전달하는 바 그 자체가 전달되는 것이었다. 신의 직접적 계시라 할 사물 언어가 인간의 신체로 문자화 되는 바로 그 순간, 사물의 미메시스적 수용은 거의 동시적으로 자발적 명명 혹은 재현 행위가 된다. 이 쓰기의 '순간'에 일어나는 유사성의 지각과 표현은 벤야민이 강조했던 순간성과 기운의 돌발성을 중첩시킨다. 순간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벤야민의 유사성이 예측 불가능한 순간 일어나는 기운의 작용과도 같은 것이다. 유협의 말대로 기운의 돌발성은 느닷없고, 따라서 사물과 인간 사이의 일체적 감각을 제때 포착하기 위해서는 항시 예민함과 민첩성을 갖춰야만 한다. 벤야민 역시 글쓰기의 계명에서 언급하기를 "어떠한 생각도 자기도 모른 채 흘려보내지 말 것"과 "직감"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기운생동의 두 번째 계기는 필획의 신체로 드러난다. 동양의 쓰기 전통에서는 이를 용필법의 범주로 다루어왔다. 골법용필이라고도 하였으니, 장언원이 이 기운을 골기라 칭할 때 그것은 생동하는 기운과 사물의 골조를 함께 의미하는 것이었다. 곧 붓의 운용 과정에서 미메시스 대상과의 감응으로 획득한 내재적 기운이 실제의 몸짓과 유형의 필선으로 구현됨을 뜻한다. 형호는 보다 구체적인 수준에서 그림(畵)을 획(劃)이라 정의하고, 실제적인 붓의 운용을 모르고서는 사물의 본질을 표현할 수가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렇게 붓으로 표현되는 기운의 성질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그것을 각각 근, 육, 골, 기라 명명하였는데, 서화일체의 전통에 따라 이는 쓰기의 획이 지닌 근, 골, 혈, 육과도 다르지 않다. 또한 필획의 기운은 붓을 운용하는 이의 기질과 연관이 있어 그리기와 쓰기의 획 모두가 신체적, 도구적 운동일뿐 아니라 심인적 운동임을 유추할 수 있다. 동양적 필사에 몰두했던 벤야민도 쓰기에 내재한 이 양의적 운동에 주목했다. 필사 곧 베껴 쓰는 행위는 눈으로 텍스트를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을 제공한다. 곧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그저 읽은 것만으로는 텍스트가 건네는 말-벤야민은 이를 "텍스트의 풍경들이 내리는 명령"이라고 부른다-에 온전히 반응할 수 없기에 온 신경망으로 문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필사와 같은 직접적 쓰기만이 기운의 형상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벤야민의 탁월한 통찰에서 보듯 붓과 펜을 쥐었던 손은 타자기에 명령하는 "손가락의 신경망"으로 그 형상화의 힘을 전이시킨다. 말라르메의 타이포그래피 실험 이래 기계적 활자들이 구성하는 다양한 시각적 형상이 직접적 쓰기의 기운생동을 전위적으로 확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직립의 비문이 탁자 위에 비스듬히 놓인 육필이 되다가 결국 서적 인쇄에서 완전히 눕게 되었다면, 이제 그 문자가 서서히 바닥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미 신문은 수평으로 보다는 수직으로 읽히고 있으며, 영화와 광고는 문자를 결국 강압적 방식으로 수직으로 내몰고 있다. _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새로운 기술 환경은 전통적 방식과는 다른 쓰기의 형식들을 요구하고 있고, 그래서 신체와 문자의 감각적 상응은 수직성의 강압 아래 있는 매체들로 인해 상이한 재료와 배열의 문자들이 공명하는 비감각적 유사성으로 빠르게 이행되고 있다. 기운의 미메시스적 계기들이 숙고되어야 하는 것도 이런 전환의 시대를 우리가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호적인 것에서 미메시스적인 것을 끌어내려했던 폴 끌로델의 결정적 단서가 붓(pinceau)이었다면, 현재적 쓰기의 매체들에서 저 고대의 쓰기가 지녔던 유사성의 성좌를 읽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매체의 언어 곧 전기의 언어, 색채의 언어, 형태의 언어 그 자체일 텐데 이는 필획의 골기를 말하던 방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쓰기의 흔적들에서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것, 이러한 읽기가 기운을 운용하는 세 번째 계기가 된다. 다양한 쓰기의 형상들을 읽는 것은 이 운동의 최초에 사물의 언어와 감응하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사물과 씌어진 것 그리고 읽는 것 사이에 일어나는 기운의 순환을 아이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벤야민의 표현처럼 아이들은 "텍스트의 놀이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텍스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는 문자의 의미를 분석하지 않는다. 그저 텍스트에 자신을 맡기고 온 몸으로 느낄 뿐이다. 습관적 읽기에 젖어 아이와 같이 문자에 동화되지 못하면 텍스트의 진실 곧 사물의 언어에는 근접할 수도 없다. 역으로 미메시스적 읽기로부터 우리는 씌어진 것들의 흔적과 씌어지지 않은 것의 징조를 교차시켜가며 어느덧 "사물들 자체의 언어"에 다가서게 된다. 유협이 <지음(知音)>에 이르기를 "흐름에 따라 원천을 찾아 들어가면 아무리 심오한 내용도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다"라고 한 것도 이러한 읽기의 방법을 알려준다. 필획의 흔적만이 아니다. 빌렘 플루서가 예측한 "문자의 섬"은 디지털 쓰기의 알고리즘에 우리의 지각과 신체를 적응시킨다. 그리고 이 전환적 쓰기와 읽기의 모델을 이상은 일찍이 그의 시로 예견해 보였다. 이상의 시에 병기된 숫자와 도형들, 그것은 분명 현재적 디지털 코드에 관한 알레고리다. 무엇보다 이들 암호화된 시어는 읽기의 습관을 해체함으로써 기호적인 것과 미메시스적인 것을 뒤섞는다. 인쇄된 활자의 배열은 지극히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데, 그처럼 반복되는 문자열 사이로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는 비선형적이고 비가시적인 시선-그래서 <오감도(烏瞰圖)>라 불린다-을 <시제1호>는 암시한다. 여기엔 읽기에 관한 선조성의 규칙이 작동하지 않는다. 연이어 불리는 아이들의 숫자는 의도된 의미의 진행마저 가로막는다. 그리하여 독자의 시선이 의미의 연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잃어버린 시적 풍경도 되찾게 된다. 끝없이 질주하게 만들던 인과론적 벽을 뚫고 13의 서로 다른 이름들이 "희한하게 결합하여 공명"하는 그런 풍경 말이다.


오감도.jpg 이상, 오감도 시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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