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적 이미지의 구성, 인용

미메시스 개념의 변용 #1

by 미정의 서

벤야민의 유년 시절은 이국적 정취의 골동품에 관한 기억과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어린 벤야민의 정신을 온통 사로잡았던 화려한 중국산 자기들, 그리고 텍스트의 원시림으로 이끌었던 필사된 표의문자들은 낯설지만 신비한 경험의 직접적 매개였다. 당시 독일의 지성인들은 동양적 사유, 특히 중국 문화와 정신에 크게 매료되어 있었고, 그 같은 문화적 기류는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신비주의적 관념성을 벗고 실천적 사회비판으로 전향하고 있었다. 신비주의적 언어 이론에 젖어 있던 벤야민에게도 또 다른 극단의 이념 축이 찾아오는데, 그것은 브레히트적 쓰기의 기법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동시대 중국 학자 리하르트 빌헬름의 번역으로 <도덕경>과 <역경>을 만난 후 <Meti: Das Buch der Wendungen(메티: 전환의 책)>이라는 산문집을 구상하게 된다. 이 산문집은 중국 고전의 전통적 서술 방식을 본떠 300여 편의 짧은 우화들을 엮어 구성하였는데, 주목할 점은 제목에서 이야기의 주체인 묵자(Meti)와 <역경>의 주제인 변화, 전환을 동시적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유가적인 것과 묵가적인 것은 서로 대립하지만 그의 표제에서는 이 극단의 사상이 함께 기술된다. 요컨대 역易 곧 변화에 관한 브레히트의 이해가 형이상학적 이념보다는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침과 밤에 관한 이미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행복한 시대는 밤을 지새면 아침이 오듯이 오지 않는다." 메티의 목소리로 전하는 이야기 모음은 구상의 단계에서 벤야민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서로에게 기꺼이 비평가가 되어준 두 작가의 교류는 음양 대대待對와 변전에 관한 동양적 사유를 자신의 독특한 변증법적 체계와 결합하는데 유효한 모티브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용"의 기법을 통해서였다. 브레히트는 장자의 텍스트를 언급하며 인용의 정신을, 묵자의 권고에 따라 체계들로부터 문장을 떼어 보는 훈련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인용은 필사의 정신과도 유사성을 갖는다. 문장을 분리해내어 독립적으로 다루는 행위는 마치 어떤 문장을 옮겨 쓸 때 제압되는 영혼의 상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기존의 연관에서 떨어져 나온 문장이 전혀 낯선 현실과 대면하게 될 때 비로소 그는 필사하는 자의 영혼과 같이 자신을 텍스트에 내어 줄 준비가 된 것이다. 그렇게 인용으로만 구성하기로 한 벤야민의 실험적 글쓰기 <파사주>는 미완의 수고 그 자체로 몇 가지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흩어져 있는 낱장의 종이 그 자체가 인용의 형식과 닮아 있다. 수집가의 태도로 스스로의 도식에 따라 광범위하고도 성실하게 '옮겨 쓴' 인용은 "설명이란 대부분 변명"이라는 브레히트의 생각을 실천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분해하고 재구성한 텍스트 조각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옷을 입게 될 것이다.


장미의 꽃잎을 따라. 꽃잎 한 장 한 장이 모두 아름다울 것이다._베르톨트 브레히트


한편 이 인용들의 '파사주'는 벤야민의 유년시절 "텍스트 사이로 난 길"을 걷던 미메시스적 읽기의 기억과도 맞닿아 있다. 학급문고에서 대도서관으로 옮겨 온 텍스트의 숲은 어김없이 그의 감각과 사유를 사로잡았고, 많은 경우 이 인용의 텍스트들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독특하고도 날카로운 글들이 생산되었다. 독립된 텍스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균열, 모순 그리고 울림이 마치 그에게 찾아온 앙겔루스 노부스가 되어 지나온 것과 현재적인 것의 역사와 예술을 새롭게 펼쳐 주었던 것이다. 그 새로움이란 다름 아닌 변증법적인 것으로, 브레히트에게서와는 달리 변전하는 사유의 운동을 "응집"하여 "정지 상태"에서 각성되는 것을 말한다. 깨어남의 시간을 기다리며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텍스트 모음에 몰입했고 집착했다. 어쩌면 인용한 텍스트들은 벤야민에게 꿈꾸는 자의 정신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유년의 기억 이미지처럼 텍스트 숲 안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그러다가 금방 빠져나온 그 길에서 텍스트의 눈송이에 흠뻑 젖은 자신을 알아차릴 때면 그의 세계도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방법론의 정수로 착안했던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는 이미 어린 시절의 낱말 놀이에서 그리고 그가 지지했던 현대적 전단지나 팸플릿과 같은 형식에서 실행되고 있었고, 자신의 서고에서는 인용의 쓰기로써 비평과 역사 기술의 구체적 형상들을 실험한 셈이다. "순수한 인용들로 이루어진 비평을 온전한 비평으로 키워낼 필요가 있다"던 그의 구상은 그렇게 방대한 양의 노트와 기록들 속에서 성좌처럼 드러났다. 보들레르와 카프카, 프루스트 그리고 초현실주의 작가 등 상이한 성격의 작가들과 작품을 횡단하며 "직조"해낸 텍스트들이 바로 하나하나의 별들인 것이다.

텍스트와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역사적 경험을 상기해내는 벤야민의 기법은 우리 시대의 작가 차정인의 쓰기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재현된다. 작가의 경험과 상형문자의 숨은 권력이 충돌하며 여전히 변주 중인 <女字 공부>가 그러한 쓰기의 궤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일상의 기록 형태인 작가의 노트는 벤야민의 <파사주>를 닮은 기록들로 빼곡하다. 더군다나 필사의 기록은 문자적일 뿐만 아니라 이미지적이어서 상형문자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실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텍스트와 이미지의 몽타주 속에서 툭 떨어져 나온 글자, '女'는 다른 글자들과 맞붙어 대개는 동아시아 여성의 인격과 삶을 지배해오던 숨은 권력이었음을 형식의 변주로 드러낸다. 그 첫 번째 형식은 상자 책이었다. 형식은 작가에게 주요한 서사의 미디엄이다. 글자 속에 글자를 꼭꼭 접어 담아 묶어 둔 상자를 어렵게 한 자씩 펼쳐내는 읽기란 문자문화의 중심으로 진입하지도 못하고 그 문자의 구속력에 저항할 수도 없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한다. 합자된 모든 '女'자들을 해체하고 최종적으로 남은 글자 '人'에 도달하면 비로소 지배적 성의 문자로부터의 구속사가 완성되는 것이다. 책 속의 활자 '女'가 걸어 나와 신체들과 공명하는 두 번째 형식, <女字의 공간>은 대립적 세대와 성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서사다. 인쇄된 책 속에 가만히 뉘어 있던 '女'자의 결합체들은 온몸으로 써 내려간 작가의 문자들로 직립해 서고, 그 사이로 탈락되었던 여자가 직접 걸어 들어가 스스로를 강제했던 문자들에 대항한다. 문자의 사회학이 요구하는 여성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이 걸음들은 예술로 성취하는 소리 없는 저항이요 또 혁명이다. 그리고 이 女字의 문자적 쓰기는 또 한 번의 변형을 거치며 여성적 놀이의 전형적 매체인 인형으로 옮겨 간다. 기괴하게도 엄마의 자투리 천을 입고 되돌아온 여자 인형들에는 손이 없다. 그 손은 누군가를 위해 '쓰인' 무명의 여인들의 것이고, 작가의 '쓰기'는 그렇게 타인을 위해 '쓰인' 손을 한 땀 한 땀 재현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재현된 손은 어디에도 없으니, 벤야민이 동경했던 유년기의 "유령 같은 현상"이 인형의 언어로 되살아나 소리 없이 女字를 대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형의 모티브에 사회 비판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던 시대가 있다."
_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IMG_2719.JPG 차정인, Who made the characters of woman?, 1997
IMG_1160.heic 차정인, 女字의 공간_여자인형,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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