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미메시스 읽기 #3
언어로 전이된 인간의 미메시스 능력은 동물의 "의태 Mimikry"에서 그 유사성을 엿볼 수 있다. 본능적으로 동물은 주위 환경과 유사해짐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 같은 자기 보호 본능이 인간 언어에서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사성을 지각하고 동시에 유사한 것을 창조해내는 능력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는 벤야민이 파악한 언어의 본질, 곧 미메시스 대상의 마법적 측면과 미메시스적 구성에 의한 마법의 해체를 모두 지니게 되는 근거가 된다. 그의 유년기는 그런 언어의 마법이 언제든지 발현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사성을 파악하는 능력은 실은 유사해지고 또 유사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래된 강제가 미약하게나마 남은 잔재나 다름없다. 내게 이러한 강제를 행사한 것은 낱말이었다. 나를 예의 바른 행동의 모범과 닮게끔 하는 낱말이 아니라 집, 가구, 옷들과 유사하게 만드는 낱말이 그러하다. _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사물에 대한 미메시스적 언어 능력을 묘사한 이 텍스트에서 놀이, 정확하게는 놀이에 내재한 미메시스 능력을 떠올리게 된다. 놀이의 모방 대상이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물에도 적용되듯이 벤야민에게 언어란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 체계이기 이전에 사물을 닮게 하는 유사성의 본능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한 단어와 관련된 그의 유년시절 경험은 언어로 전이된 의태의 내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누군가 "Kupfestich"라고 발음하는 것을 어린 벤야민이 들었고, 다음날 그는 의자 아래에서 머리를 내미는 행위 곧 "Kopf-verstich"를 실행하였다. 두 단어 "Kupfestich(동판화)"와 "Kopf-verstich(머리 찌르기)"에서는 어떤 의미론적 유사성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벤야민이 듣고 그 후에 '실행한' 낱말은 의미론적으로 해석된 기호라기보다 머리를 내밀어 보임으로써 그 단어와 유사해지려는 일종의 미메시스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 행위는 언어의 왜곡에서 비롯되며, 이때 왜곡은 부정적 의미에서의 뒤틀림이 아니라 미메시스 대상을 창조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벤야민은 말한다. "그러한 오해는 내게 세상을 왜곡시켰다. 하지만 좋은 의미에서 그러했다. 즉 오해는 세상의 내면으로 향하는 길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왜곡이 기호라는 딱딱한 언어를 해방시키고 그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세계의 본질로 그의 시선이 옮겨질 때면 자주 등장하는 알레고리가 있다. 바로 "난쟁이 꼽추"다. 단지나 냄비를 깨뜨리고 또 시리얼을 쏟는 등 실수가 반복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를 관찰하고 있는 이 왜곡된 상이, 아이러니하게도 망각하고 있던 벤야민의 기억을 되돌린다. 단어와 사물에 동화되면서 생긴 상은 스스로를 왜곡시키지만 동시에 그 상을 통해 미메시스 대상의 내부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유년시절의 기억 속에서 벤야민은 중국산 도자기를 베끼다가 색색의 구름과 함께 일그러지며 그림 속으로 사라지던 자신을 회상해내기도 하고, 낡은 스테인드글라스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며 색채의 포로가 되었던 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
유사해지고 동화되는 일, 그것은 비단 음성과 사물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언어의 또 다른 형식인 문자들에서도 미메시스적 재능이 작동한다. 손으로 새겨 넣은 글자들 속에는 무의식적 상이 함께 기록된다. 그리고 필적학은 바로 그 글자에 새겨진 "수수께끼 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벤야민이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글씨들에서 문자의 시원을 엿보거나 혹은 특정 장소를 환기하게 된 것도 이런 필적학적 해석과 연관이 있다. 그림엽서에 기록된 헬레네 푸팔 Helene Pufahl 선생의 서명은 자음으로만 구성된 셈족의 언어로 다시 재조합되면서 "모든 미덕의 뿌리"가 된다. 그리고 떠올리는 이름, 루이제 폰 란다우. 그 이름은 "텅 빈 무덤"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막상 그 이름을 떠올렸던 장소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게 서명과 이름은 다른 기억을 지닌다.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 서명에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된 것이다. 또 한 사람의 필체는 모든 것을 "블루메스호프 Blumes-Hof 12번지"로 환원시킨다. 여행지에서 보내온 엽서에는 "구름처럼 떠다니듯 휘갈긴 커다랗고 쾌적한" 외할머니의 필체가 새겨 있어 그 모든 이국적 장소들을 "블루메스호프의 식민지"로 삼기 때문이다. 이렇듯 벤야민이 기억하는 필적의 이미지는 쓰기 행위에 내재해있는 미메시스의 힘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동양적 쓰기에서 일상적인 우주적 모사가 그의 회상을 통해 "문명화된 사람들의 필적", 보다 넓게는 기계적, 매체적 쓰기의 영역으로 확장해 간다.
역사적으로 보면 동양의 쓰기에서는 이미 필체의 "관상 physiognomie"이라는 것이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 왔다. 예컨대 채옹은 글씨에 깃든 힘의 근원을 자연에서 찾기도 하고, 쓰기를 성정과 개성의 표현으로 보았던 손과정 또한 역사적 서체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이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벤야민은 "중국의 필경사를 문자문화의 보증인"으로, 또 그들의 필사 행위를 "중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로 기술한다. 신체와 문자상이 직접적으로 상응하는 이러한 쓰기의 기술이 사물과 공명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언어가 전달의 수단이 아니듯 문자상 곧 형상의 언어 역시도 벤야민에게는 사물의 정신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미디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필획의 신체만이 "천리에 진을 친 구름이나 떨어지는 돌, 혹은 무너지는 산과 같은 것(위부인의 <필진도>)"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는 없다. 손가락 신경망이 두드리는 자판의 문자들과 형형색색 빛으로 써 내려간 수직의 광고 문구들도 벤야민의 미메시스 곧 사물과의 근친 관계를 드러내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매체의 다변화에 따른 기술적 쓰기가 신체적 흔적을 대체하면서 감각적 유사성은 보다 비감각적인 것으로 진전하게 되는데, 이는 상형문자와 알파벳이 각각 그 대응하는 것과의 결합 방식에서 보이는 유사성의 차이를 재현한다. 곧 알파벳 문자가 소리와 갖는 연관에는 어떠한 인과 관계도 없지만 이들은 수수께끼 같은 근친 관계로 묶여 있으며, 따라서 문자의 발전 단계에서 그것은 "가장 최근의 것"이며 동시에 "가장 비감각적인 것"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자상을 실행하는 쓰기에 있어서도 미메시스 행위의 전환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필적의 미메시스가 정관적이라면, 기술적 쓰기의 문자들은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우며 서로 다투는 철자들"로 나타난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 창의 유리 파편들이 시시각각 다른 형상을 비춰내듯 기계적 문자의 형상들도 각기 자율성을 획득하며 이질적 기호들의 결합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고요한 정관 속에서 체화하는 필사의 정신과 분주한 감각들의 도시에서 우연히 만나고 순간적으로 지각하는 문자들의 떼-벤야민은 이런 문자들을 메뚜기 떼에 비유했다-는 분명 다른 텍스트의 마법을 실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기의 정신과 기술이 변하여도, 여전히 그 행위의 본질은 미메시스적이다. 그리고 이 쓰기의 무의식적 상은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투시력을 요구한다. 벤야민은 대도시의 거리를 그런 신비적 행위의 토대로 삼았고, 제2의 자연이 되어 버린 기술 환경 속에서 미메시스적으로 읽고 쓰는 길을 내주었다.
이미 입구에 쓰여 있는 명패와 간판들에는, 그리고 이미 안쪽 벽을 따라 계속 이어져 있는 명패들에는 뭔가 수수께끼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알베르, 83번지'는 아무래도 미용실일 테고, '마요 드 테아트르'는 실크트리코 상점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이목을 끄는 글자들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_발터 벤야민, <아케이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