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미메시스 읽기 #2
벤야민은 과거 "별들의 만남 Konstellation"을 읽어내던 점성가의 행위에서 읽기의 두 가지 차원을 분석해내고 있다. 하나는 기호학적 해독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미메시스적으로 "읽어내기"이다. 언뜻 "투시력의 토대"였던 미메시스적 읽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범속한 읽기로 대체된 것 같지만,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 태곳적 행위는 오히려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전이되어 '언어 속에서' 사물들의 본질을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처럼 미메시스적 읽기 행위가 언어로 옮겨가면서 미메시스 대상과의 "자연적 상응"이라는 마법적 속성은 사라지고 "비감각적 상응"이 대상과 주체를 연결하게 된다. 사물의 마법적 성격을 해체하면서 그 사물과 조응하는 이러한 언어 능력을 벤야민은 번역이라는 행위에서도 발굴해내려 한 것 같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번역이란 사물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변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환 능력의 핵심은 아담의 언어, 아이의 언어가 간직한 창조적 수용력과 맞닿아 있다. 벤야민이 말하듯 "인간은 스스로 사물의 이름 없는 무언의 언어를 수용하여 그것을 음성 속의 이름으로" 옮겨낼 줄 알았다. 수용성을 전제로 한 이 창조 행위는, 뒤집어 보면 사물 언어 자체에 내재해 있는 "번역 가능성"의 실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번역 가능성이란 인간과 사물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여러 상이한 언어들 사이에도 작동할 것이고, 그렇게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의 내적 관계를 표현해내는 것이 좁은 의미에서의 번역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음성으로만 표현되는 언어 간 변환(좁은 의미의 번역)을 살펴보는 것은 처음 사물과 음성 사이에 공명하던 내밀한 상응 관계(광의의 번역)를 유추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번역이 그저 하나의 언어 기호가 지닌 표면적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라면, 벤야민의 분석처럼 열악한 번역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번역자-벤야민은 특별한 언어의 상태를 바라본다. 그것은 바로 "순수 언어 diereine Sprache"라 불리는 상위의 언어이다. 스스로 번역자가 되어 이 언어의 세계를 탐색했던 그가 보들레르의 시 번역을 위해 서문으로 기술한 텍스트인 <번역자의 과제>에는 상이한 언어들 사이의 번역 문제가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 원작의 내용을 모사하는 정도에 만족할 경우, 그러한 번역은 비본질적인 것만을 전달하거나 그조차도 부정확하게 전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원작의 언어와 번역자의 언어가 공유하는 근원적 근친성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벨탑 붕괴 이후, 언어는 나뉘고 서로 다른 음성과 기호로 불리고 표기되었다. 그렇게 언어들의 소리와 형상이 이질적으로 갈라져 왔음에도 언어들은 서로 공명한다. 마치 단어들이 그려내는 또 하나의 성좌처럼. 벤야민이 인간의 언어 속에서 통찰해낸 진실은 이러하다.
여러 언어에서 동일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낱말들을 찾아내 그 의미된 것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빙 둘러 늘어놓을 경우, 어떻게 종종 서로 하등의 유사성도 보이지 않을 그 낱말들이 모두 그 낱말들의 중심에 놓인 그 의미된 것과 유사성을 보이는지를 연구해볼 수 있다._발터 벤야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그러고 보면 서로 다른 언어들이 횡단하며 그리고 있는 성좌를 읽어내는 것, 곧 개별 언어들이 불완전하게 드러내는 의도를 서로 상보적으로 채워가는 과정을 실천해 보이는 것이 번역자의 과제다. 이때 이 언어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의미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의미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것으로부터 끌어내어 낯설고 개별적인 언어들 상호 간의 유사성을 보게 하는 것이 진정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번역자에게는 루돌프 판비츠가 요구한 대로 "언어 그 자체의 궁극적 요소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그 능력은 벤야민 자신의 번역 속에서 실천했던 순수 언어에 관한 탐색과도 무관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이 궁극의 언어에 이르는 번역은 낱말들이 각각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며 상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동시에 그 불완전함은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담보하게 되는데, 만약 원작의 언어가 이 가능성을 적게 지닌다면 곧 충실한 의미 전달에만 매여있다면 번역은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번역의 기법 중 직역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했던 벤야민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직역을 통해 언어들이, 정확하게는, 낱말들이 서로를 보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의 길에서 이질적인 기호들 사이를 횡단하게 하는 순수 언어란 어쩌면 '공백'이 아닐까. 그래서 그것을 파악하기가 어렵고, 오로지 개별 언어의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드러남 속에서만 접근할 수 있기에 더욱 기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스테판 말라르메는 이 공백에 새겨 있는 순수 언어를 번역해내고자 전승된 기호의 기능 곧 의미 전달체로의 문자들을 전혀 새로운 바탕 위에 펼쳐 놓는다. 페이지는 사라지고 "그래픽적으로" 배열된 활자들은 그가 <유추의 악마 Le démon de l'analogie>에서 걸어가 본 "알 수 없는 말"의 변형들과 닮아 있다.
La Pénultime
Est morte
시인의 말은 의미에서 벗어나 있다. 말라르메의 표현 그대로를 옮기자면 입술 위의 말은 "의미의 공백"으로 변해 있었다. 그 순간, 이전에 알아보지 못했던 소리가 어떤 골동품 악기의 현처럼, 또 조금 있다가는 "이해할 수 있는 목소리"로, 마침내는 "개성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독자적 모습"으로 나타나며 공백을 횡단한다. 언어의 몰락과 함께 잊혔던 소리들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 잊힌 소리의 복원을 꿈꾸는 자, 그들이 바로 시인이다. 그들은 언제나 기호적인 것에서 미메시스적인 것을 발굴해낸다. 에코랄리아스를 찾아 나선 한 언어학자의 분석처럼, 말라르메는 자신의 언어 속에서 사라져 가는 음소들의 흔적을 탐색하며 단어들을 새롭게 읽어낸다. 사라진 소리는 아마도 인류가 망각해버린 순수 언어의 파편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의 시각적 번역을 위해 활자들은 배열의 틀 바깥에 배치된다. 지면을 넘나들며 활자들이 공명해내는 소리, Un coup de dés - jamais - n'abolira - le hasard는 또 하나의 "알 수 없는 말", "의미의 공백"이 되었다. 순수 언어로 가는 우회로가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