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미메시스 읽기 #1
하만 Johann Georg Hamann은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신을 모방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다만 신의 언어가 지상의 언어로 직접 중개되는 것은 아니며 알레고리나 상을 통해 인간은 신의 언어 혹은 사물의 언어에 근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하만의 언어관은 한 세기가 훨씬 지나 벤야민을 통해 새롭게 해석된다. 하만이 아담의 언어에서 '낱말'의 직접성과 마주친 것처럼, 벤야민은 인간 언어의 기원에서 "이름언어 Namensprache"를 보았다. 기존의 유형화된 언어학을 떠나 벤야민의 언어적 본질은 "명명하는" 행위에 있으며 그 최초의 행위는 근원적으로 인식하는 행위와 구분될 수 없었다. 말과 이성을 일체화했던 하만의 사유가 이렇게 벤야민에게서 재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인식과 사물의 일체성 그리고 직접성을 지녔던 인간의 언어가 오늘과 같은 기호적 수단으로 몰락하게 된 계기도 아담의 행위와 연관 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취한 후 일체였던 언어는 명명의 대상과 분리되고 직접적인 것에서 간접적인 것으로 추락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의 시작은 이들 신비주의적 언어 이론가에게 인류의 역사이기 이전에 언어의 기원과 몰락의 역사가 된다.
성서라는 모티프에서 인간 언어의 기원을 사유했던 벤야민은 신의 창조 언어로 그의 사유를 소급해간다. <창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창조주가 "있으라"라고 명령하면 그대로 사물이 이루어지고 다시 창조주는 그 사물을 명명하는 과정이 되풀이된다. 창조주에게 언어는 창조적 생산이며 동시에 창조적 인식인 것이다. 이러한 창조 질서에 단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아담이 창조되는 순간의 일이다. 그는 흙이라는 구체적 물질을 빚어 그 속에 창조주의 생기 혹은 "숨결 Odem"을 불어넣은 존재였다. 그리고 창조주의 숨결과 함께 아담에게는 언어가 주어졌다. 그가 부여받은 언어의 창조성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신적 능력은 아닐지라도 그 속성을 닮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곧 사물에 새겨진 신의 징표를 수용하여 그것을 정확하게 명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최초의 인간 언어는 신적 권능의 "방출"이고 "위임"이라는 것이 벤야민의 주장이다. 인간이 자신을, 사물을, 그리고 타인을 명명하는 모든 행위를 그는 "신성한 말씀의 깊은 모사"라고 부른다.
인간 언어의 본질에 관한 벤야민의 신학적 견해는 "이름언어"라는 개념 속에서 더욱 극명해지는데, 이름 der Name은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고 그것 속에서 언어 자체가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전달하는 무엇"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이다. 언어의 직접성은 벤야민의 언어 마법을 드러내는 첫째 형식으로, 언어를 단순한 의미 전달의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거듭 강조된다. 언어적 본질의 정점에 있는 이 이름언어의 속성은, 비록 "불완전하고 말이 없는" 사물의 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언어인 한에서, 공유하게 된다. 요컨대 사물이라는 "소재적인 공동체" 역시 "언어 전달의 공동체"처럼 직접적이고 무한하며 마법적이라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 두 형식의 언어 마법 곧 인간의 이름언어와 "사물언어 Dingsprache"가 신의 말씀 속에서 근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사물의 말 없는 말이 인간의 음성으로 번역 가능하게 된다고 보았다.
인간이 태초에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은 모두 살아 있는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신은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입과 가슴속의 이 말씀으로써 언어의 기원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아이들의 놀이처럼 지극히 가깝고 쉽다. _발터 벤야민,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신에게서 방출되고 그 속에서 사물의 언어까지도 번역 가능하게 된 아담의 언어는 어린아이들의 놀이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아이들의 놀이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사물과 유사해지려는 태도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실제로 아이의 언어에는 어떤 투명성이 있다. 그들은 언어를 단순한 기호로 다루는 법이 없다. 그래서 아이의 말은 태초의 명명이 지닌 힘으로 사물과 만나고 또 사물을 호명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비더마이어 Biedermeier 시대에 인기를 누렸던 아이들의 낱말 놀이에서 보듯 아무 연관도 맥락도 없는 단어의 구성은 "성인들의 일상어"보다 "성스러운 텍스트의 문장들과 더 많은 친화성"을 지니게 된다. 더욱이 그들의 언어는 음성적이기보다 행위적이다. 때로는 원시적 언어가 지닌 강렬함을 아이의 언어가 나타내 보이는데, 벤야민이 보았던 "묘사하는 목소리 동작들"이 지닌 마법적 특질이 바로 그 실체다. 원시인들의 강렬한 제의에서 경험하게 되는 언어 마법은 몸치장과 춤 동작 그리고 정령과의 직접적 소통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소리들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공감각적 이미지들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이 생생한 소통은, 원시적 언어의 신비한 속성이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 발견되는 미메시스적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시사한다. 결국 언어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벤야민의 사유는 개체 발생과 계통 발생의 측면 모두에서 궁극적으로 미메시스 속성을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아담의 언어와 아이의 언어, 그리고 원시 언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미메시스 능력은 사물을 창조적으로 그리고 표현적으로 수용하도록 지시한다. 그러니 언어의 몰락이 초래한 비생산적 모방을 아이들의 언어를 통해 복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년기의 기억을 언어로 그려낸 벤야민의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은 사물과 단어의 근친 관계를 읽어내는 일련의 안내도와 같다. 사물 혹은 장소와 연관된 단어들은 그의 표현대로 "기호적으로" 쓰였지만 또한 "미메시스적으로" 작동한다. 어린 벤야민이 단어와 사물에 창조적으로 순응하는 방식은 "스스로 나비가 되는 것"이었다.
나비와 꽃들이 사냥꾼이 보는 앞에서 주고받는 낯선 언어-사냥꾼은 그 언어로부터 몇 가지 법칙을 찾아냈다. 그러자 사냥꾼의 살의는 줄어들고, 그 대신 나비에 대한 신뢰는 더욱더 커졌다. _발터 벤야민, '나비 채집'
나비의 언어가 자신의 행위를 지시하는 동안 어떤 한 단어가 그의 내부로 들어왔다. 그 단어는 '브라우하우스베르크' 곧 양조장 언덕이라는 나비 채집의 기억을 갖게 해 준 장소의 기호였다. 하지만 단어는 벤야민의 회상처럼 "양조장과는 무관했다." 어른이 되어 다시 꺼내어보는 기억 속 단어는 나비들의 색채와 비행이 새겨 놓은 어떤 "신성함"을 지니고 있었고, 그가 들었던 기호 속 떨림은 아마도 태고의 언어들이 지녔던 미메시스적 힘의 잔상이었을 것이다. 아이의 언어를 되찾는 것은, 이렇게 단어들을, 사물들을 마주하는 '낯선' 경험과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극도로 정확한 사물 이미지 속에서 오히려 "유익한 소외"를 준비시켰던 초현실주의의 방법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때는 친숙하고 자연적인 소리와 몸짓이 지금은 낯설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유아기의 언어를 잃어버리면서 기호로부터, 사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켜온 탓이다. 누구나 성장하면서 겪는 이 언어의 몰락을 스스로 인지하는 순간, 현실의 사물과 단어로부터 느끼는 생경한 인상은 그 외피에 달라붙어 있던 기호들의 수다를 걷어낸다. 언어의 직접성이 파괴되고 사물이 지닌 무언의 언어가 순수한 이름으로 불려지지 못하면서 사물은 온통 무의미한 수다로 변질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기계적 복제 기술을 닮은 이 기호의 "과다 명명"이 "범속한 각성"의 순간을 견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언제나 이 같은 순간의 깨달음을 가지고서 사물과 언어의 세계를 탐색한다. 예술가의 언어가 아이의 언어와 닮은 이유다. 신비주의적 언어 이론으로 밀어냈던 벤야민의 언어 마법이 이들 예술가의 낱말 상자 속에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행위로 되살아난다. 기호적인 것에 갇혀 있던 단어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단어나 사물과의 공명을 창조해내는 것이 그들의 임무며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들의 놀이처럼 이루어지고, 거듭 말하거니와 놀이의 본질은 대상과 유사해지려는 미메시스 속성에 있다. 물론 벤야민의 미메시스는 이 유사해지는 행위 속에서 대상이 지닌 마법적 힘을 극복하고 해체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하여 기계적 기호의 반복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관념으로부터 단어 그 자체의 울림을 복원하려고 했던 시적 실험은 내게 냉담한 사물들에게서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게 하는 초현실적 사진 기술과 같은 각성의 반전을 펼쳐 보인다. 이제 아이의 눈으로, 시인의 언어로 텍스트 상자를 열어 볼 준비가 되었고, 그러면 신의 창조에 참여했던 아담의 언어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