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스텔레이션

쓰기의 실험실 #2

by 미정의 서

관념적 추상예술의 맞은편에서 매체와 수단 그 자체로 이야기하는 구체 예술은 20세기 중반 언어의 진영도 뒤흔들었다. 지시 대상과 의미로부터 벗어나 오직 언어라는 재료에 몰두하여 낸 창작이 구체시의 실험실에서 일어난 것이다. 일련의 작가들에게는 언어가 물질적 요소로 환원되어 시각과 청각이라는 두 가지 감각 요소만 남게 되었다. 전후 빈 그룹 Wiener Gruppe의 음성시 Lautpoesie와 시각시 visuelle Lyrik가 그 같은 극단의 시적 경향을 대표한다. 이들은 화가가 색과 형태만으로 대상 없는 풍경을 창조하듯 언어와 문자를 동일한 방식으로 다룬다. 그중에서도 오이겐 곰링거 Eugen Gomringer의 구체시가 다른 전위예술가의 시도와 다른 점은, 전통적 통사론과 선형적 문자 배열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대신 그 배열의 질서 내부에 숨겨진 언어와 문자의 가능성을 탐구하는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시를 언어 그 자체의 성찰 대상으로 삼았던 곰링거는 시의 재료인 단어에 몰두했고 단어의 배열에 따라 시의 다의성이 창조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schweigen>은 단 하나의 단어만으로 구체시의 아이디어를 완벽하게 표현한다. "가장 이상적인 구체시는 원칙적으로 단 하나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던 곰링거의 이상이 문자 그대로 실현된 셈이다. 시행의 배열은 선형적이면서도 문장이 아닌 단어로만 구성되어 어순, 구두점과 같은 통사론적 규범이 전혀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어떤 수사적 묘사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단어를 소리 내어 읽으면 바로 그 '침묵'을 깨뜨리는 행위가 되고, 역으로 schewigen의 배열 정중앙에 배치한 공백은 그 자체로 '침묵'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곰링거의 시에서 단어는 의미 전달의 기호를 넘어 하나의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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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몬 Franz Mon은 곰링거의 이 배열을 평면 der flache의 개념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문자의 생성 조건인 "사이 공간"은 몬의 평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것은 "기호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기호의 제스처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좌에서 우, 위에서 아래로 고착화된 알파벳 통사론의 지각 방향은 단순한 배열의 여백 공간으로 인해 사방으로 확장된다. 그렇게 시는 평범한 읽기를 유보시키고, 철자와 사이 공간의 연관에서 나타나는 형상을 소리 없이 조망하게 한다. 만약 익숙한 방식으로 행을 따라 읽을 때면, 우리의 시각은 그 배열의 전체적 형상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대개 구체시는 그 독법에 있어서 전통적 글줄을 따르기보다 하나의 이미지로 보는 시점이 중요하다. 독특하게도 몬의 <rotor da Konstellation>은 r-o-t-o-r의 마름모꼴 배열로 단순한 반복과 순환의 리듬을 생성한다. 비선형적 배열에 더하여 알파벳 낱자의 점이는 그러한 리듬에 변화와 공간감을 얹는다. 물론 이 단어-형상 또한 곰링거의 시만큼, 아니 그 보다 더 의미로부터 멀어져 있다. 그럼에도 이 철자들의 연관에서 시제가 넌지시 건네 오는 암시 곧 성좌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역설적으로, 몬의 평면은 오히려 우주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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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배열, 철자의 배열은 구체시를 이루는 주요한 모티프기도 하다. 그리고 그 배열은 발터 벤야민의 "이념"과도 닮아 있다. 벤야민은 하나의 이념과 사물들의 관계를 성좌와 별들의 관계로 보았다. 사물과 별은 각각 자립적이고 불규칙한 파편이지만 이들이 모여 연관의 형상을 이룰 때 그것은 성좌라는 장엄한 우주로 우리에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어의 배열만으로 시각적 연관을 상상해내는 구체시의 속성 역시 성좌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예시한 시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단순한 반복이 벤야민이 정의했던 극단들의 공명이라는 이념과 유사성의 범주로 논의될 수 있는가는 숙고의 대상임에 분명하다. 곰링거와 몬의 배열이 '성좌로서의 시'가 되기 위해서는 최고로 단순화시킨 언어의 축약, 그 사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연상의 가능성"을 쫓아야 한다.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구체시의 단어는 반복적이다. 곧 요소의 동질성이 시의 본질을 이루고 그것은 이질적인 것들의 유사성과는 서로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r o t o r의 구성이 시각적 점증으로 멈추지 않고 구체시의 창조자들이 기대했던 공백으로부터의 연상이 충분히 가능하다면 이 극단적 시각시에서도 언어와 사물이 공명하던 태고의 미메시스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벤야민의 이념은 그러한 읽기에 주요한 이정표가 되어준다.

벤야민의 쓰기는 언제나 익숙한 읽기에 맞서게 한다. 수수께끼처럼 잇댄 그의 텍스트 조각들 속에서 평범한 의미의 연관이 문득 낯설어지는 순간을 경험할 때도 있을 것이다. 무수한 비평의 언어들에서 돋보이는 그만의 독창적 구상 또한 인간 언어 일반을 대상으로 부단히 탐구하고 성찰했던 미메시스 능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와 같은 텍스트의 별자리를 촘촘히 읽다 보면, 어느새 기호적인 것에서 미메시스적인 것을 보았던 벤야민의 감각적 경계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더욱이 언어와 문자, 감각적 극단들과 쓰기의 기술을 다루는 그의 능력은 비밀스러운 친화성이라는 "비감각적 유사성"에 기대어 있고, 이 모순적 연관에 다가서기엔 어쩌면 극도로 단순한 기호, 철자의 시각화가 최적의 기법일 수도 있겠다. 선형 배열이 알파벳의 보편적 존재 방식이라면, 그리고 기호적 읽기의 표준이라면, 침묵 schweigen은 그와 같은 구조 내부로부터 생성된 균열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기호들 사이에서 매번 새로이 나타났다 곧 사라지는 침묵의 형상은 벤야민이 즐겨 비유했던 구름과도 같다. 그 자취는 모호하고 수시로 변하는 구름은 얼마든지, 또한 가능한 모든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렇게 침묵의 공간은 무한한 번역 가능성이 되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 가능성을 어슴푸레라도 비춰보려면 벤야민이 내어 둔 텍스트의 길로 직접 걸어봐야만 한다.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_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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