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마저 평화로운

아쉬운 지중해의 하루

by 미정의 서

언젠가 지중해를 낀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다. 동해와 서해만 둘러봐도 색깔, 냄새, 대기가 다른데 사하라에서 불어오는 괴테의 시로코나 지중해로 부는 고흐의 미스트랄도 같을 리 만무하다. 그 도시에 살면서 이 바람의 이름들을 탐색해 보는 일도 즐거울 것이다. 여행 후 기록들은 항상 아쉬움을 남기고, 미처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지나친 장소들이 다음 여행을 기약하게 한다. 벤야민의 베를린이 그렇고 세잔의 프로방스가 그렇다. 이탈리아를 열흘간 돌아다니면서도 정작 피우미치노 상공에서 본 바다가 유일했던 지중해도 마찬가지다. 그처럼 아쉽고 그리운 지중해의 시간을 남편의 저녁 식탁으로 달래 본다.

무더운 여름, 일에 지쳐 피곤한 우리는 이스라엘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재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해외를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장거리 비행을 과감하게 결정했다. 그렇게 떠난 여행이 우리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 했다. 언젠가 나이가 들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수많은 순례객들의 틈바구니 속에 있는 그림만 어렴풋이 떠올려보았을 뿐 이름만 평화로운 그 도시의 중심과 주변부 국가에 정착한 진짜 순례자들과의 만남은 상상조차 못했다.

이국땅에서 먼저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남매를 키우는 여인, 몇 차례의 수술로 지친 육체를 이겨내며 누군가를 섬기는 부부, 혹 성경 속 예수의 묘사가 그와 같았을까 싶을 만큼 마른땅에 돋은 여린 순처럼 위엄이나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외모의 남성, 이 모두가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예수의 사랑을 살아내고 있었다. 잘 지어진 교회와 웅장한 성가대의 연주 그리고 지루하지 않게 적절하게 배치된 예배 형식에 익숙해져 정작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실체를 잊고 지내던 때, 우리는 위기를 맞았다. 그 위기를 잘 끝내가고 있을 무렵, 마치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처럼 이스라엘로의 거부할 수 없는 초청이 온 것이다. 그래서 결정했고, 그 결정은 옳았다. 우리의 위기는 삶을 온전히 사랑에 내어 던진 그들이 마주한 파도에 비하면 미풍에 이는 잔잔한 물결이었고, 그 삶에 비춘 우리는 충분히 가지고서 여전히 더 가지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잠시 시간을 내어 해안가로 향했다. 더위를 피해 머물렀던 하이파의 카페 2층에서 요나의 물고기를 보았다. “네가 우리를 이곳으로 불렀니?”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 갈 박넝쿨만 찾고 있던 우리에게 뜨거운 눈물과 고통을 견뎌내며 밤낮으로 타인을 위해 사는 세상을 보여주려 바다 반대편으로 신호를 보낸 것이 분명하다. 해변가에 서서 우리가 온 저 반대편을 생각해 보았다.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들이 남았고 또 언제 그런 위기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감사한 생이다. 오늘을 사는 진짜 그리스도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벤 구리온 공항에 맡긴 내 수하물엔 여느 여행때와는 다른 기념품 세 가지가 담겼다. 동방박사의 선물과 같은 무게로 여전히 내 서고에 보관하고 있는 세 가지는 조그만 나무조각, 조약돌 하나 그리고 수첩 한 권이다. 나를 위해 서툴고 섬세하지도 못한 목각의 마리아와 엘리사벳을 고르던 일흔 넘은 백발의 여인을 잊지 못한다. 목각 받침엔 이국 이름 대신 그녀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그 지역의 특징적 지류를 찾는다는 아들과의 대화를 전해 듣고 우리네 초등학교 앞 작은 문구점에서 구할 법한 팬시한 수첩을 곱게 포장해 수줍게 건네던 중년의 여인도 내 마음에 각인해 두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위해 선물한 점박이 조약돌엔 세피아 빛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שלווה

지중해의 식탁을 앞에 두고 코로나 가운데 우리 모두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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