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와 위로

뚱딴지의 향기

by 미정의 서

어려서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문학보다는 하나의 답이 정해져 있는 수학이 좋았다. 한 두해 나이를 먹으면서 흑백의 숫자에 의미를 채색하는 일이 잦아졌다. 202호. 남편의 특별한 밥상이 시작되고 내 화답의 문장을 끝내는 이곳은 같은 숫자의 다른 공간이다. 나만을 위해 준비한 남편의 요리를 기록해 두고 한 편 한 편 이야기를 짓는 사이, 우리는 또 한 번의 이사를 했고 우연히도 새 집은 이전과 같은 숫자판을 달고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정착해서 만난 사람들을 그리고 있었고 결말 즈음엔 그 추억의 장소를 떠나 있었다.

오랜 도시생활을 접고 내려온 두 번째 202호는 겸재의 안개와 비와 달의 풍경을 옮겨 놓은 듯한 한적한 시골마을에 있다. 남편의 이직과 함께 마련된 집은 군자산, 성불산, 오봉산을 산울 삼고 그 사이로는 괴강이 흐른다. 석양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저녁마다 찍어둔 그의 <해지는 오봉산>은 세잔의 산을 참 많이 닮았다. 호기심에 화가처럼 산행을 떠나볼까 하는 먼 계획도 세워보지만 아직은 시골길이 낯설고 두렵다. 가까이 있어 먼저 친해진 것은 돼지감자꽃이다. 지천으로 피어있는 노란 꽃잎이 궁금하던 차에 남편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환자가 직접 말려 우려낸 돼지감자꽃차였다.

손쉽게 티백으로 먹던 차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일 테다. 맛도 맛이지만 환자의 정성이 곱디고왔다. 꽃을 따 하나하나 정성껏 말려 찻물에 띄웠을 때 펼쳐 나눌 행복을 내내 마음에 품었을 것이다. 그녀의 향기가 사진 너머로 전해온다. 이제 식탁의 온기에 향기를 더할 차례인가 보다. 남편의 밥상, 다정했던 이웃들의 기억 그리고 글쓰기, 모두가 코로나로 얻은 선물이었다. 그렇게 위기의 시절을 지나는 동안 나는 위로를 얻었다. 아픔으로 빚어낸 따스한 향기를 얇은 모조지 노트에 선화로 옮기고 색연필을 적셔 은은하게 노란 빛깔도 더해본다. 그리고 획마다 새겨 넣은 위로가 닿기를 바라며 먼 곳에 있는 나의 벤야민과 언니를 위해 몇 자 글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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