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아이와 부부

무시로 갈치조림

by 미정의 서

집안 곳곳에 메모지가 숨겨져 있다. 여행지에 가면 특징적인 메모지를 사 오는 것이 언제부터 습관이 되었다. 가장 저렴하기도 하고 종이마다 지역색이 묻어 있어 다급히 메모거리를 적다가도 오랜 여행의 기억 한 자락을 건져 올리는 즐거움이 있어서다. 최근 수집해 둔 것은 메이드 인 제주다. 붉은 동백과 푸른 해녀가 정사각형 한 귀퉁이에 앙증맞게 자리 잡고 있어 제주의 겨울과 여름을 한껏 상상하게 한다. 두 번의 봄, 한 번의 가을, 여름, 겨울을 기억하고 있으니, 제주의 사계를 다 맛본 셈이다. 물론 계절마다 추억이 다르다. 엄마와 함께 했던 제주는 가을이었고, 흐릿한 겨울 제주엔 선생님과 선배 내외가 동행했다. 봄의 제주는 우리의 첫 여행지였다. 그때의 기억 서랍에는 갈치조림, 전복죽, 초콜릿, 이 세 단어가 남았는데 남편은 그중 하나를 미식여행의 마지막 메뉴로 정했다. 부부가 좋아하는 무를 먹음직스럽게 썰어 넣고 정성껏 손질해 보낸 엄마의 갈치와 함께 매콤하게 졸인다. 이중섭의 그림처럼 식탁 위에 펼친 밥상은 <무시로 갈치조림>이다.

이따금 잠자는 남편의 표정과 포즈를 기록해 둔다. 그 모습이 이중섭의 <해와 아이들>을 닮아서 몇 해전까지도 혼자 꺼내 보며 키득대기도 했는데, 심장에 이상 신호가 오면서 얼굴 속 아이들이 사라졌다. 게다가 마스크는 피곤하면 미간 주름부터 짙어지는 그를 ‘안 웃는 남자‘로 오해하게 만드니 남편의 매력인 해맑음을 낮이고 밤이고 볼 수가 없다. 커튼 사이로 가늘게 새어드는 가로등 불빛에 잠든 남편의 얼굴이 드러나고, 두 번째 제주의 봄볕을 걸으며 바람에 실어 보낸 말소리가 들려온다. 나이 들어가면서 정오의 햇살처럼 뜨거울 수는 없어도 서쪽 하늘 지는 해를 뒤따르는 어스름처럼 평온할 수 있으면, 우리의 표정이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켜내기가 어려운 시절이다. 언제쯤 화가의 아이들처럼 해의 얼굴을 담고서 매일을 잠들 수 있을까.

세 번째 제주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중산간 작은 마을에 조그만 방 한 칸을 빌려 이틀밤을 지냈다. 일로 다녀가면서 짧은 휴가를 낸 터라 남들 찾는 여름 바다 대신 천천히 마을 풍경이나 담아가자 했다. 일을 마치고 캄캄한 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찾은 숙소에 짐을 내리자마자 남편은 곯아떨어졌다. 제주의 밤이어서일까. 낮시간의 피로가 다 가시지 않았지만 해와 아이들의 미소가 잠든 남편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무슨 즐거운 꿈이라도 꾸는지 그늘진 주름마저 보이질 않고, 그렇게 오랜만에 남편의 곁에서 나도 단잠을 잤다. 소리 없이 안마당을 찾은 아침햇살에 눈을 뜨니 고양이 아침을 챙기러 나온 젊은 안주인의 실루엣이 지나간다. 아침 밥상이 다 준비된 모양이다. 식당 문을 열자마자 주홍빛깔 해처럼 방긋 웃는 아가의 얼굴이 아침 인사를 건넨다. 젊은 부부의 식탁은 소박하지만 정성 넘치는 밥과 찬으로 구성되었다. 수차례 제주를 다녀가면서 그런 밥상은 처음 받아보았다. 재료 하나하나, 손이 많이 가는 찬 구성 그리고 색깔로 구분해 둔 갖가지 음료병마저 감동이었다. 다섯 별점은 이제 막 스물 끝자락에 닿은 듯한 부부의 삶에 보내는 여행자들의 응원이고 칭찬이었다.

그리고 반백의 우리, 늦은 결혼에 바쁘게만 달려오던 우리에게 여름 제주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 여름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을 했다. 길게는 오십 년 짧게는 십 수년 일구어온 일과 관계를 되돌아보았다. 나쁜 일도 있었고 기쁜 일도 있었다. 미운 사람도 있고 고마운 사람도 많다. 그중에 남편과 아내로 만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사람일까. 그에게 나는 그만이 알 테고, 나에게 그는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선한 사마리안’이다. 덕분에 나는 늘 기다리고 포기해야 했다. 나의 꿈, 나의 일, 나의 건강도. 여전히 화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아직 그와 살고 있고 여전히 ‘그의’ 선한 일을 돕는다. 덕분에 이웃들은 나를 이타적 인간으로 오해하지만, 그의 일과 관계들에 나는 철저하게 거리 두기를 한다. 심지어 아직도 내가 그의 아내인 것을 모르는 이도 있다. 체호프식의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경계는 아니어도 내 나름의 선이 있다. 그래야만 나를, 내 마음을 지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 부부의 진심 어린 밥상이 그처럼 단단한 나의 ‘선’을 넘어왔다. 여행지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선물을 전해주고 온 것도 처음이었다. 마을의 책방을 찾아 그림책 한 권을 샀다. 그리고 푸른색 정사각형 메모지에 짧게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아기가 그런 엄마 아빠의 따스함을 닮아 자랐으면 좋겠다.




이전 16화미정의 다정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