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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Dec 15. 2023

Basin with Crosses

일곱 교회 순례기 9 사데

사디스의 하늘은 더없이 파랗고 트물루스 산자락에 걸린 구름은 바람에 밀려 점점이 새하얀 무늬를 덧댄다. 미다스의 신화는 온통 금빛 조형물로 뒤덮인 도시를 꿈꾸게 하지만 보이는 것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과 그 틈에 피어오른 야생화 그리고 잎과 잎 사이를 떠도는 나비들 뿐이다. 이제는 오페라극 무대처럼 배경으로 서 있는 그리스식 김나지움과 잔해조차 풍요로운 유대 시나고그를 나비의 날갯짓 따라 여유롭게 둘러보다 문득 황금손의 역설을 떠올린다. 더없이 화려하고 탐스러워 보이는 그 손의 재능은 무능에 가까웠다. 스치는 것마다 생기를 앗았으니 말이다. 요란하지만 죽은 이 도시의 환상을 비유의 언어로 옮겨 전한 사도는 교회가 그렇게 변질될 것을 염려하고 경계했다.  


어느 폐교 건물을 예배처로 삼았던 교회에 성도들이 늘어갔다. 교회 일원에 아파트촌이 들어섰고, 십수 년이 지나 미다스의 손이 작은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다. 빌딩 사이 언덕 위에 선 옛 학교 건물이 좀 촌스럽고 낡기는 했지만 작은 동네의 첫 번째 지번이니 오히려 고답적인 인상을 지닐 법하다. 하지만 무능한 그 손이 붉은 벽돌을 빼내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새 성전이 들어설 예정이다.


주일 점심 식사 준비에 지친 성도들이 안쓰러워 목자는 이리저리 예산을 맞춰 주방 에어컨 설치를 제안했다. 어차피 열원 때문에 에어컨이 소용없다는 전문가와 그래도 설치하자는 목자의 설전도 쓸데없는 일이었다. 전기 증설 자체가 불가했다. 오랜 교회 건물 자체가 무허가 건축물이어서 철거하고 신축하는 방법 외엔 해결책이 없다. 해 저문 논두렁 길에서 올려다보는 언덕의 교회 첨탑이 오래전 눈물로 벽돌을 쌓아 올리던 어느 목자의 밀알 같은 헌신으로 빛난다.


복원 중인 시나고그의 모자이크 바닥과 대리석 벽장식은 시대와 양식의 층을 켜켜이 쌓아 수집해 둔 아름답고 섬세한 문양들의 저장고 같다. 조화로운 색감과 정교한 무늬의 파편에 매료된 렌즈들이 열정적으로 기록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그저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것에서도 쉬 눈을 떼지 못하는데, 눈부신 공간에 휘감겨 지내던 성도의 눈에 사도의 흰 옷이 보일 턱이 만무했다. 그럼에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몇”이 있었고 그 소수의 성도에게는 생명이 약속되었다. 미다스의 손이 스친 벽돌은 옛 영화를 아련히 새겼으나 생명을 지니지 못했고, 밀알이 된 벽돌은 죽었으나 살아 있다.  


안내자의 설명이 길어진다. 고고학적 해석은 활자로 다시 들춰보면 될 테고, 가만히 무리를 빠져나와 남아있는 물건과 옛이야기를 이어 보는 익숙한 놀이에 빠졌다. 

눈에 익은 그리스 기호들이 방향 표지판처럼 바닥에 새겨 있다. 두 발을 그림 옆에 대어 본다. 막막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아브라함의 얼굴이 새김선 위로 떠오르고 어떤 소리가 들린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몇 걸음 옮겨 정결수가 담겼을 돌항아리 귀를 만져 본다. 그러자 시나고그의 사람들이 묻고 예수가 답한다. 

-당신들의 제자들은 떡 먹을 때 왜 손을 씻지 않습니까?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안내자의 음성 반대편 끝에는 금지선을 두른 대리석 판이 두 마리 석상과 함께 외롭게 서 있다.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는 선의 끝까지 다가가 긴 두루마리 토라를 얹고 다른 한 음성을 듣는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


시나고그를 돌아 나오는 길, 옛 아케이드의 어느 상점에서 이야기의 절정에 이른다.  

그곳은 오래전 페인트 가게였다. 건축물의 외관과 내부를 장식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어쩌면 일가족이 그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은 갖가지 안료를 실어 나르고 아버지는 다른 안료들을 주의 깊게 배합한다. 아내와 딸은 세밀하게 새겨놓은 선을 따라 칸칸이 칠해 넣을 색 조합을 맞춰본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건물의 표면이 이들의 수고와 정성으로 완성되고 사람들은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수세기가 지나고 내 앞엔 십자가가 새겨진 안료통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돌벽 뒤로 오른 자그마한 언덕엔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 붉은 벽돌 위로 강렬한 보색 지붕을 얹어 놓은 것만 같다. 나무 팻말에 새긴 글자들 <BASIN WITH CROSSES>은 내겐 자꾸만 십자가가 선 언덕으로만 읽힌다. 

아름다운 돌과 미려한 장식에 감탄하는 소리들이 지나가고 세미한 바람에 한 문장이 실려온다. 

-너희가 그토록 감탄하는 이 모든 것, 이 성전의 돌 하나하나가 결국 잔해 더미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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