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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Sep 27. 2023

[희망] 오랜 기도처럼 끝은 분명 있었다.

훗날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끝이 분명히 있다는 걸 알고, 지금을 즐길 수 있게 해 주세요."


오랫동안 이렇게 기도했다. 어둡고 긴긴 터널을 행군하고 있었다. 이 터널 안에는 오직 우리 둘뿐. 다행히 우리는 서로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다. 우리가 보낸 시간을 정리해두려 한다.


우리는 부지런히 밥을 챙겨 먹었다. 집에서 다양한 음식을 해 먹었다. 그는 요리를 좋아하고 잘했다. 동파육이나 치킨, 라자냐와 까수엘라를 만들어 먹었다. 종종 배달음식이나 외식으로 식사를 챙겼다. 동키치킨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한동안 매주 먹었고, 요즘은 타코야키도 배달이 된다는 말에 늦은 밤 야식으로 이따금씩 먹었다. 언제 가봐야지 했던 동네 식당들도 탐방하듯 찾아갔다.


터널에서 대화도 많이 했다. 어떤 날은 로또 당첨이 되면 무얼 할지 계획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 옆으로 한 나라씩 이동하며 여행하자, 차를 바꾸자 등 얘기만 해도 기분 좋은 계획이었다. 앞날에 대한 각자의 불안감을 토해내기도 했다. 가족계획과 커리어에 쌓여가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뉴스를 잘 보지 않는 내게 요즘 화제가 무엇인지 알려주기도 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날카롭게 주고받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티기타카를 이어가며 자지러지게 웃기도 했다.


때때로 우리 방식대로 각자 시간을 보냈다. 홀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태국으로 나는 이탈리아로. 타국에 있는 혹은 타국에서 서로를 생각하는 건 애틋하면서도 쓸쓸했다. 한편 이제는 집에서 각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제법 익숙하다. 그가 게임을 할 때면 나는 곁에서 책을 읽거나 피아노를 친다.


매달 이달의 주말 음식을 정해 즐기는 것도 기억에 남는다. 토요일 이른 점심식사로 외식을 하는데, 한 달 동안 먹을 음식 한 가지를 정하는 것이다. 가령 8월엔 돈까스라고 정하면 토요일 점심은 여러 식당에서 돈까스를 먹는 식이다. 같은 돈까스지만 가게마다 맛과 스타일이 달라 식사 후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좋아했다.


날이 좋은 저녁엔 밖으로 나갔다. 석촌호수를 걷고 탄천을 걷고 동네 유흥가를 거닐었다.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옆 동네 시장으로 새 버리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면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던 나인데, 몇 번 나가보니 알겠더라. 아침이면 창문을 열어 공간을 환기시키듯 사람도 문을 열고 나가 환기를 시키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이 어둡고 지난한 터널에서 우리가 싸운 적이 거의 없다는 건 좀 놀랍다. 터널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싸웠으니까. 나는 툭하면 그를 확-하고 할퀴었다. 언젠가 그는, 집에 돌아오는 게 즐겁지가 않았노라며 지난날을 고백할 정도로 그를 힘들게 했다. 이 터널에서 서로를 원망할 수도 비난할 수도 이 상황을 한탄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되려 작은 생채기라도 날까 봐 정확하면서 다정하게 표현하려 애썼다.


"저기 빛이 보이네. 곧 이 터널이 끝나나 봐."


오랜 기도처럼 끝은 분명 있었다. 이제야 희미한 희망이 생긴 것 같다. 어쩌면 빛이 보이고 희망이 생긴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빛과 희망이 서로에게 있었다는 걸 이제 깨달은 걸지도.


훗날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터널 안이 너무 어두워 두려웠다고 말하려나. 아님 그래도 그때가 재미있고 좋았다고 그리워하려나,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가장 어두운 이 터널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또렷이 보았다는 것을. 서로가 빛이고 희망이라는 걸 이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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