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글쓰기


언론사 필기시험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언론사 입사시험 준비를 하면서부터였다. 2차 필기시험의 벽을 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스터디 모임을 하면서 글을 썼고, 저널리즘스쿨에서 글쓰기를 배웠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필기시험에서 계속 쓴맛을 보았다. 신문기자, 방송기자, 피디 가리지 않았다. 3년간 그랬다.(사실, 이쯤 되면 포기해야 한다) 4년차에 접어들자 필기시험을 계속해서 통과하기 시작했다. 필기시험을 계속 통과했다는 것은 면접에서 계속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4년간 탈락의 쓴맛을 맛보며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글쓰기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마지막으로 지원한 언론사 시험에 처음으로 최종 합격해서 피디로 일하게 됐다. 그리고 글쓰기는 멀어졌다.



직함이 사라지는 순간

2월의 어느 저녁, 퇴직하신 선배님과 삼겹살집에서 식사를 했다. 은퇴 이후의 일상에 관해 들었다.

"안빈낙도의 삶을 살고 있어"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그분의 안색은 좋으셨고, 헬스장에서 건강관리도 잘하고 계신다고 했다. 아쉬운 것은 '명함'이라고 하셨다. 퇴직 선배의 현재가 15년 후 내 미래이다. 국장, PD 직함이 사라진 은퇴생활. '나는 그때 나를 뭐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 선배님은 말씀하셨다.

"나무의사 자격증을 따든지, 책을 내서 작가 명함을 가지든 회사 다닐 때 준비해 놓으면 좋아"

지금 당장 내가 책을 어떻게 낼 수 있을까. 막막했다.



책쓰기 수업

초등학교 자녀의 책을 사주기 위해 방문한 서점에 강원국 선생님의 <책쓰기 수업>이 진열돼 있었다. 고민하던 주제이고, 예전에 제작했던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해 주신 인연이 생각나 반갑게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은 가장 두꺼운 명함이요, 장대한 자기소개서'라는 소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 블로그를 열게 한 대목을 만났다.

"자신의 글을 공유할 거점이 있어야 한다. 거점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고, 그렇게 글이 모여야 책이 된다. 글 쓰는 거점은 또한 글을 쓰게 만들기도 한다. 장기 레이스에서 자신의 홈구장을 갖추는 건 필수적이다."

저자는 '게릴라가 아지트를 옮겨 다니듯 페이스북,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매체에서 글을 쓴다'라고 책에서 말한다. 나도 사회적인 매체에서 글을 써야 계속 쓸 것 같다. 혼자 일기 쓰면 게을러서 한두 번 쓰고 만다. 운이 좋다면, 글쓰기가 노후의 명함이 되어주고, 연금이 되어주기를 바라본다. 그런 행운 없이 글쓰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 카페에 앉아 수첩에 끄적거리는 시간들이 뭔가 위안이 되기도 했다. 휴대전화 들여다보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적으면서 생각을 하면 '나'라는 사람도 잘 숙성이 되지 않을까. 이제 인생의 반환점에 와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의 결들이 잘 배어있는 사람으로 늙어가야 할 것 같다. <책쓰기 수업>에서 강원국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쉰 살까지 반사체로 살아왔다. 나에게 일을 시킨 사람의 말과 글을 읽고 들어서 그 사람이 원하는 말과 글을 만들어주는 일을 했다. 말과 글을 받아서 말과 글로 되쏴 주는 일로 월급을 받았다. 나뿐 아니라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대부분 이와 유사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직장을 그만둔다. 더 이상 반사체로 살 수 없는 때가 온다. 그땐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로 살아야 한다."


예전에 제작한 <개인사편찬위원회>라는 프로그램인데, 강원국 선생님 방송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https://youtu.be/bSZrJO-tiZU?si=ZwY6eWqd60I13Y6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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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쓸 것인가

2024년, 오스트리아 여행 가서 마이리얼트립 사이트를 찾아 미술관 투어를 했다. 비엔나 미술관(Kunsthistorisches Museum)과 레오폴드 미술관(Leopold Museum)을 오전과 오후로 나눠서 보는 코스였다. 투어를 진행해 주신 손성희 도슨트께서 말미에 남겨 주신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에곤 실레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어원을 따지면 '삐딱하게 세상을 보다'입니다. 에곤 실레는 스스로 이름을 짓고, 자기만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이름을 짓는다면 뭐라고 지을 건가요. 스스로 이름 붙인 자신만의 빛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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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삐딱하다'라는 말 때문에 '왼손잡이'를 떠올렸던 것 같다. 나는 밥 먹고 글씨 쓰는 일은 오른손으로 하고, 운동하면서 놀 때는 왼손을 쓴다. 원래 왼손잡이인데 어른들의 눈이 닿는 영역에서는 오른손잡이가 됐던 것 같다. 공간에 글을 쓰면서 '왼손잡이 시골 피디'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일단 가장 쉽게 쓸 수 있는 평소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일하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다큐멘터리, 영화, 책 이야기도 쓰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계속 써 보기로 한다. 게을러지면 이 글을 보면서 다시 마음을 붙잡기로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