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그만두고 스페인 여행길에 오른 30대 딸, 은퇴 후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부모님과의 140일간 산티아고 순례 배낭여행을 기록합니다.
2,887km 찐으로 걷는 배낭여행
✅ 프랑스길 Camino Francés (2018)
✅ 피스테라, 무시아 Camino de Fisterra y Muxía (2018)
✅ 은의 길 Vía de la Plata (2022)
✅ 북쪽 길 Camino del Norte (2022)
✅ 영국 길 Camino Inglés (2022)
여행 속 사진은 그때의 하이라이트만을 보여준다. 수많은 감정이 생략되어 있다. 은의 길을 걸었던 39일 중 30일 정도는 대체로 평균 이하의 감정이었다. 긍정과 부정의 감정 시소를 탄다면 몇백 그램 정도는 부정이 조금은 더 무겁지 않았을까. 도대체 산티아고는 언제 나오나 손가락으로 디데이를 세었던 날이 많았다.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를 기다렸다기보다 이 길을 서둘러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산티아고에 들어가는 날이 왔다. 표지석의 잔여 거리는 어느새 한자리 수가 되었다. 10, 9, 8, 7, 6km… 카운트 다운을 시작한다.
사람이 3명이면 생각도 3개고, 가치관도 3개고, 여행의 의미도 3개이다. 그만큼 마음을 하나로 맞춰 동시에 걸어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더 갈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이 벅차면 원치 않을 때 쉬어야 하고, 내 몸이 아파도 어찌 됐든 꾸역꾸역 길을 나서야 한다. 혼자가 아닌 셋이 걷는다는 건 그런 뜻이다.
아빠가 많이 양보를 했다. 이번 여행의 대장이자 체력과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 은의 길에 대한 아쉬움은 아빠가 가장 많이 남을 거다. 바퀴 달린 탈 것의 도움을 받은 지난 몇몇 구간이 있는데, 온전히 두 발로 완성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연식이 가장 레트로인 아빠가 사실 체력적으로 제일 나았다. 혼자라면 충분히 해냈을 수 있는 그였지만, 본인의 의지를 내려놓고 다른 두 명의 의견을 많이 들어주었다.
“가족이니깐 맞추며 가지, 남이었으면 같이 가기 어려워”
아빠는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여행의 고충을 자주 이야기 했다(...ㅋㅋ)
엄마는 무슨 고생이냐 싶었다. 지난 과거에 비춰 한껏 기대했던 까미노의 그림과 낭만이 이곳에서는 꽤나 달랐고, 오줌 눌 곳 하나 찾기 어려운 그곳은 말 그대로 ’생고생’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가족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목표인 그녀였기에 ‘완주’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거기에 식사까지 제대로 하지 못해 심신까지 약해지니, 기어코 앞으로 가야 하는 아빠가 얄궂기도 했을 거다. 하루가 다르게 까매지는 피부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그녀에겐 매일이 ‘현타’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우아한 여행을 하고 있을 동년배 친구들을 생각하니 괜히 내가 다 미안해진다.
"다시는 걷는 여행 하나 봐라"
아빠가 저만치 앞발치에서 가고 있으면, 뒤따라가는 엄마는 마음의 소리를 내뱉곤 했다. (물론 나도 동조했다. 아빠 미안)
그들을 돕고자 함께한 여행이었다. 나는 그들이 오롯이 길을 걷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걷는 일을 제외한 의식주를 덜 불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산티아고를 가는 길이 덜 고생스러워 과정의 행복을 충만하게 느꼈으면 했다.
하지만 난 복병이었다. 매일의 일정을 계획하고, 예약하고, 안내하고, 사진을 찍는 기능적인 task는 충실했지만, 정작 여행 일원으로서의 역할은 낙제점이었다. 나는 제일 젊었다. 하지만 제일 약했다. 나의 체력은 나 하나 끌고 가기 벅찼고, 다른 사람의 안위를 돌보기 어려웠다. 까다로웠고 불친절했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후진 모습을 매일같이 스스로와 마주해야 했다.
마냥 좋을 수만은 없는 여행이었다. 각자의 이유로 아쉬웠고, 고군분투했다. 그럼에도 나는 은의 길의 마침표를 찍은 우리에게, 엄마아빠에게 진심 어린 칭찬을 하고 싶었다.
은의 길은 어른들의 성장이었다. 편한 생활만 하고 지냈다면 평생은 몰랐었을, 자신의 가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을 만났다. 그리고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가까운 시간 내에 후회를 하고, 행동을 수정하고, 적응하며 생활을 완성시켜 나갔다. 매일 조금씩.
참 멋진 삶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 얼굴의 주름은 늘 지언정, 여전히 성장할 수 있음을 나의 부모로부터 배운다. 그들로부터 멋진 인생이 무엇인지,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야 할지 본보기가 되는 무형의 유산을 받아간다.
그 고생을 하면서 돈 들여 굳이 그곳에 왜 가냐고 묻는다. 어른들의 성장, 이것이 산티아고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은의 길을 끝이 났지만, 우리의 여행은 아직 진행형이다. 끝이 끝이 아니다. 한 단락의 마침표를 찍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간다.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기대하며.
여행은 이어진다. 북쪽길로 가자.
가족 여행기 산티아고데까미노 은의 길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처음 써보는 거라 부족한 글이었을 텐데 관심을 갖고 꾸준히 들여다봐주셔서 힘이 되었습니다. 쓰는 동안 다시 한번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값지게 생각합니다.
북쪽길도 이어서 쓸 예정이에요. 더 예쁜 바닷길이 이어지는 북쪽길 풍경 구경하러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