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길7 마지막
직장 그만두고 스페인 여행길에 오른 30대 딸, 은퇴 후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부모님과의 140일간 산티아고 순례 배낭여행을 기록합니다.
2,887km 찐으로 걷는 배낭여행
✅ 프랑스길 Camino Francés (2018)
✅ 피스테라, 무시아 Camino de Fisterra y Muxía (2018)
✅ 은의 길 Vía de la Plata (2022)
✅ 북쪽 길 Camino del Norte (2022)
✅ 영국 길 Camino Inglés (2022)
⏰ 포르투갈 길 Camino Portugués (2023 예정)
며칠 전부터 북쪽길을 끝내고 남은 일정은 어떻게 보낼지 고민을 했다. 리턴 날짜까지 5일 정도 여유가 있어, 스페인 기차 여행도 보고 다른 유럽국가 여행도 찾아봤지만 맘에 콕하고 박히는 게 하나 없었다. 그나마 암스테르담이 가장 구미가 당기긴 했는데 꽤 경비가 들었고, 지금 이 체력으로 가봤자 숙소 근처서 산책만 하다 오겠지 싶어 어영부영 여행 계획을 미루고 있었다.
그때 아빠가 까미노 영국길은 어떠냐고 제안을 한다. 영국길은 짧은 루트라 5일이면 된다고.
영국길? 일단 일정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맞아서 깔끔하다. 산티아고 루트를 도장 깨고 다니는 장인이 된 것 같다. 그럼 못 먹어도 고지!
그러고 보니 아빠는 왜 이렇게 열심히 걷는 걸까. 무엇이 아빠를 계속 걷게 만들지. 미처 걷지 못한 길에 남은 아쉬움? 더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
나에게 산티아고 까미노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모와의 여행’이었다. 청소년 때도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니, 사실상 부모와 시간을 꽉 차게 보낸 건 유년기 시절이 전부다. 우리는 부와 모, 딸이라는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고, 각자의 생애주기에 맞춰 '살아내느라' 바빴다. 어느새 나는 삼십 줄, 엄마는 육십 줄, 아빠는 칠십 줄이 되었다. 물 흐르 듯 흘려보내면 마냥 흘러갈 수 있는게 시간이었다. 어 어 어 하는 사이 시간은 저멀리 달아난다. 그렇기에 도망가는 시간의 뒤통수만 벙찌게 쳐다보며 살고 싶진 않았다. 내 시간은 내가 통제하며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인생은 유한했다.
생애주기가 다르다는 것은 인생의 과제가 다름을 의미한다. 삼십 대의 과제란 타인과 세상과의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압도적으로 요구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를테면 자기 기반을 넓혀가는 것이 중요한 이슈다. 하지만 인생의 다른 과제에 떠밀리다보면 우리의 최적의 타이밍을 놓쳐버릴 것 같았다.
감사하게도 나의 부모는 장시간 비행이 가능한 건강과 팔다리,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적당한 열정이 있었다. 건강과 시간과 돈과 마음의 여유, 이 네박자가 맞아 떨어지는건 정말 매우 아주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인생 시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언젠간 사그라들지 모를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까미노였고, 이번 여행 나의 목적이었다. 그들과 농도 짙은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게 전부였다.
꽉 찬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들의 작은 변화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들의 '다음'은 꽤나 쉬워졌다는 점이다. 영국길을 결정하는 것이 동네 마실 가듯 쉬워졌고, 올 가을에는 포르투갈 해안길을 두 분이 걷기로 할만큼 까미노가 별게 아닌게 됐다. 경험이 쉬워지는 것, 그래서 '다음'을 계속 만드는 것, 자신감을 얻어 가는 것, 작은 변화이지만 가장 커다란 보람이다.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에 나오는 구절이다. 맞다, 20대 때 많은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지난 여행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그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십여년 전 혼자 남미로 여행을 갔다오고, 혈혈단신 낯선 런던에서 방을 구해 살았던 것처럼 그 때의 흔적은 지금 나의 일상에 차근히 녹아져 있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은 언제, 어떤 의미로, 내 삶에 다가올까?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묻지 못했다.
"엄마 아빠한테는 이번 여행은 어떤 의미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