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그만두고 스페인 여행길에 오른 30대 딸, 은퇴 후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부모님과의 140일간 산티아고 순례 배낭여행을 기록합니다.
아빠는 잠자리에 들기 전 다음날 경로를 미리 확인한다. 아침 숙소에서 막 나오면 어젯밤 준비해둔 지도로 방향을 확인하고 아빠가 앞장서 길을 연다. 숙소가 순례길에서 벗어나 위치한 경우도 있어 헷갈릴 때가 종종 있는데, 이럴 때만 내가 서포트하는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 날도 보통날처럼 익숙한 아침 풍경이다. 별달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될 길이었고, 살핌 없이 나는 아빠 뒤만 쫄래쫄래 따라갔다. 길만 감상하면서.
의심 없이 평소처럼 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점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우리 앞에 나있는 길이 하나고, 지나온 길에서도 크게 헷갈릴만한 지점이 없었다. 애매했다. 맞는 길로 왔다고 하기에는 노란 화살표시가 너무 없고, 잘못 왔다고 하기에는 작은 표식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의심을 품으면서 계속 걸었다.
이거 아무래도 잘못 온 게 맞다.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너무 안 보인다. 질퍽한 땅 위에는 발자국이 나있지 않고, 걷는 길목마다 거미줄이 쳐져있다. 사람 발길이 안 닿아서 그런지 수풀이 제멋대로 뻗어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하지만 아빠가 확인하는 어플은 이 길이 맞다고 한다. 이 놈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것 같은데?! 차츰 엄마와 나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러고 나서 다른 어플로 다시 확인해보니, 지금 우리는 순례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심지어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구글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았다. 구글 지도상에서 이곳은 미지의 땅이다! 나무가 우거져있으니 괜히 더 스산하게 느껴진다. (오른쪽으로는 뿌연 강이 흐르는데 꼭 내셔널지오그래픽 악어가 나올 것만 같은 음침한 분위기다!)
그럼에도 앞으로 직진하며 길을 만들면서 가는 아빠가 있다. 그리고 점점 불안의 늪에 빠지는 엄마도 있다. 사실 길은 다 통하게 돼있어, 조금 돌아갈 뿐 본래 길이 나올 테지만, 길이 나올지언정 함께 하는 사람의 불안도를 높이고 싶진 않았다. 아빠를 돌려세워 다른 샛길을 찾는 게 좋겠다.
옆으로 나있는 길로 빠졌다. 얼마 가지 않아 좁은 농로가 나와 따라간다. 농로를 따라가다 보니 작은 농기구가 보이고, 밭이 보이고, 굴뚝으로 오르는 연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휴 이제야 한숨 놓인다. 그리고 곧 숲 속(?) 같은 곳을 벗어나, 포장이 된 도로를 만난다. 됐다! 인공의 흔적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다행히 제 길에 올라섰다. 드넓게 펼쳐진 풍경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으로 보이니 안심이 된다. 바람이 살랑 부는 전원의 경치다. 마음이 놓이니 이제야 풍경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 참 맑은 날이었구나.
짧았던 탐험 모드를 재빠르게 전환시켰다. 나도 모르게 들어간 힘과 긴장을 놓고 다시 목가 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