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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Jun 01. 2024

강렬한 사랑

어디서 봤는지 릴케의 문장 한 구절이 머릿속에 날아와 박혔다.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쓰지 않는 게 낫다.’ 


글을 쓰고 싶다 떠들며 다니고는 있는데, 나를 살펴보니 글 쓰는 재능은 없다. 그러니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열의라도 있어야 글을 쓰면서 살아갈 최소한의 보증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며칠 글을 안 쓰고 뻐겨 보면서 도무지 쓰지 않고서는 손이 근질거려서 안될 정도의 열의가 드러나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글쓰기 참아보기’ 시작 이틀이 못 되어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릴케가 말한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정도의 거창한 열정의 발현은 못 된다. 그냥 안 쓰자니 심심했을 뿐이다. 이것을 대단한 글쓰기에 대한 열의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훗날 글을 아주 많이 쓴 후에 혹시라도 누군가 왜 글을 계속 썼냐고 물어본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기 때문이죠.”


조금 아쉽지만 이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쓰고 있을 뿐이다. 써야 하는 글인지,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글인지 둘 중 하나에도 제대로 대답하기 어렵다. 지금 명백한 사실은 나는 (쓰기 위해서) 쓰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다. 이 쓰기가 읽는 이를 귀찮게 할 것이 자명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쓰고 있다. 사실 제일 귀찮은 건 나 자신인 것 같기도 하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글을 이유 없이 쓰고 있으니 이것만큼 사서 고생인 일이 어디 있을까?


어떻게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나. 어릴 적부터 일기 쓰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결혼하면서 만년필을 한 자루 샀기 때문도 아니다. 매일 뭔가 끄적이는 습관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이 부분은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이다. 어쩌다가 쓰게 되었는지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금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앞서 말했듯 ‘나는 쓰고 있다.’ 정도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쓸지, 여태껏 얼마나 써왔는지 하는 것들은 지금 시점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어제는 지나갔으므로 바꿀 수 없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니 모른다. 다만 쓰고 있는 지금이 좋고, 안 쓰고 못 배길 정도는 아니지만 쓰는 게 자연스럽고 즐겁다.


그러니 써서 뭐 할 것인가는 그만 묻기로 한다.(라고 하면서 주기적으로 묻는다) 뭘 할 생각은 없다. 소설가가 된다느니, 아니면 시대의 지성이 된다느니 혹은 작가 선생님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가끔 소설도 쓰고, 나름대로 세상을 해석해 보기도 하는 글을 쓰는 거지 그걸로 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목적 중심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성취하는 인생 같은 건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영영 지속되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나는 ‘지금’이라고 부르는 시간에 늘 쓰는 인간으로 남아있고 싶다.


아침 해를 두 번 봤을 뿐인 짧은 이틀이지만 쓰지 않고 지냈던 이틀 보다 지금이  즐겁다. 글을 쓰면 자유롭다. 빈 화면에 무언가 글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좋다. 비어있는 나의 시간이 글을 쓰는 시간으로 채워져서 참 좋다. 글과 사랑에 빠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이 사랑이 내 삶의 시간을 글쓰기라는 활동으로 채워 넣고, 글쓰기로 점차 채워지는 내 삶이 어떤 모양이 되는지 지켜본다. 오,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무언가 만들어 내려면 사랑에 빠지는 수밖에 없다. 새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도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던가.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소설이든 시이든, 그 어느 것도 아닌 이런 종류의 글이든 사랑이 없이는 쓸 수가 없다.(사실 이런 무용한 글이 가장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릴케의 말을 떠올려 본다.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쓰지 않는 편이 낫다.’ 이것을 ‘사랑’으로 해석하면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사랑에 빠진 인간은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만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너무 거창한가. 안 쓰고 못 배기는 정도는 아니라고 하면서, 글쓰기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앞뒤가 안 맞는 말인 것 같다. 실은 안 쓰고 못 배긴다고 하면 너무 거창해지는 것 같으니, ‘사랑에 빠졌다.’고 돌려 돌려 말해 보는 것이다.


이쯤 적고 보니 사랑에 빠진 게 맞는 것 같다. 내 시간은 두 개로 나뉜다. 글을 쓰고 있는 시간과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간의 두 가지이다. 쓰지 않을 때도 쓰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쓰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할 필요도 실은 없었던 것이다. 


글을 사랑해서 많이 많이 썼는데,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두려웠다. 어쨌든 하루는 24시간이고, 내 인생은 하루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이 좋아서 글 쓰느라 주어진 하루하루를 많이 썼는데 아무것도 아니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더 많은 증거를 외부에서 모으려고 했다. 재능을 인정받은 작가는 뭐라고 말하는지 다 주워 모았다. 천재는 최소 몇 살 전에 두각을 드러낸다느니, 안 쓸 수 있으면 안 쓰고 사는 게 낫다느니 하는 말을 가져와서 나의 글 쓰는 미래를 어느 정도 보장받고자 했다. 오지 않은 미래란 누구도 알 수 없는데, 나는 지금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준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런 짓도 이제 다 소용이 없다. 안 쓰면서 살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럴 수 없다면 써서 뭘 할 건지, 쓰고 나서 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안 쓰는 선택지는 없다. 글을 쓰면서 살아갈 수 있을 뿐이고, 쓰는 것이 즐겁고 자연스럽게 여겨진다면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 사회적으로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어떤 길을 살아가려 했던 마음이 ‘쓰는 사랑’ 앞에 무력해지는 순간이다. 이제는 어떻게 되든 별로 중요치 않다. 그냥 글을 사랑하며 살련다. 


쓰다 보니 그런 건지, 아니면 이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건지 모르겠다. 점차 타인의 눈에는 불가해한 인간이 되어 가는 것 같다.


글을 쓰면서 트랙에서 벗어난 걸까. 트랙에서 벗어나면서 글을 쓰게 된 걸까. 분명한 것은 점점 타인의 삶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표준이 아닌 하나의 고유함에 다가가고 있다. 


이전에는 ‘여러분도 글을 써 보세요’ 따위의 말을 자주 했는데, 이제는 하지 않는다. 별로 소용이 없는 말이다. 쓸 사람은 쓰라고 하지 않아도 쓸 테고, 쓰지 않을 사람은 뭐라고 해도 쓰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일찍 쓰거나 더 늦게 쓰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쓸 사람은 결국 쓰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글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가끔 보면 마치 글쓰기가 모두에게 딱 맞는 만병통치약 혹은 해결사처럼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런 건 없다. 저마다 자신만의 삶의 양식을 찾아야 한다. 그건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다. 


글을 쓰는 것도 마치 대단한 활동인 듯싶지만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게 글쓰기가 잘 맞을 뿐이다. 글을 쓴다는 이유로 마치 모두가 글을 써야 하며, 나는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매번 나 자신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자칫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우쭐댈 소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란 순전히 자기가 좋아서 하는 행위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뭣하러 이렇게 긴 글을 써서 괴로움을 자처한다는 말인가. 밥 한 톨 되지도 않고, 칭송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시간은 시간대로 써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좋아하지 않는 데 글을 억지로 써야 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글쓰기가 재미없고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거든, 하지 않아도 별로 생각나지 않거든 그냥 안 쓰는 게 낫다. 다른 걸 하면 된다. 나는 그게 안돼서 쓰고 있을 뿐이다.


‘쓸모’라든지, ‘목적’ 같은 건 잘 모르겠고 이제는 관심도 없다. 다시 말해서 ‘왜’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됐다. 목표의식 이라든지, 치밀한 계획 같은 것들, 어쩐지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다.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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