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십이월의 의미

십이월은 기나긴 겨울 방학이 있는 달

아빠가 선물을 놓아두는 날이 있는 달

한 살 더 먹고 빨리 어른 될 수 있는 달

십이월은 기말고사 벼락치기가 있는 달

바깥에서 손잡고 걷기엔 꽤 추운 달

온장고에 진열된 음료 꺼내 손에 쥐어주는 달

십이월은 저물어 가는 달

아빠의 빈자리로 바람이 들이치는 달

전역의 해를 기다리는 달

십이월은 2가 1이 된 달

둘이던 우리가 하나 된 달

나는 끝나고 우리가 시작된 달

추운 겨울도 함께라는 사실에 따뜻한 달

처음 맞이할 새해도 함께 맞는 처음이기에 희망찬 달

지난 일 년을 함께 했구나 감사하게 되는 달

작년 오늘, 우리 부부는 남은 인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결혼해도 애 없으면 똑같다.’는 얘기만 줄곧 들어왔는데, 아니었다. 결혼을 약속한 시점부터 더 끈끈한 관계가 됐다. 남자, 여자친구일 때는 결혼했을 때보다 책임을 덜 진다. 상대에게서 결정적인 성격적 결함을 발견하거나,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면 헤어질 수 있다. 워낙 이상한 사람이 많은 시대이니, 서로 충분히 탐색해 볼 시간을 갖는다. 언제든 재선택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채 말이다.

결혼은 재선택의 여지를 지우는 것이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오래 만나온 여친, 남친이지만 속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이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완벽하게 파악한 후에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혼은 위험을 안는 것이다. 이 남자, 여자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결혼을 약속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평생 삶을 함께 하고, 가족을 이루어 살아간다는 말인가. 평생 그런 약속을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다 커서 만난 남자와 여자가 그런 약속을 한다는 말인가. 

결혼은 상대를 다 알아서 위험부담이 없을 때 선택하는 길이 아니다. 결혼은 상대를 믿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신뢰의 표현이다. 나도 상대도 불완전하지만 서로의 불완전함을 그러안고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다. 바로 이 신뢰가 결혼과 남친, 여친이 주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신뢰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을 지기로 기꺼이 마음먹는 사람은 책임 없는 관계가 주는 즐거움보다 더 근원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한 사람을 다 알지 못해도 신뢰한다는 데서 오는 기쁨, 그리고 상대방이 나를 다 알아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존재 자체로 신뢰한다는 즐거움은 서로 간의 약속 밖에서는 누릴 수 없는 기쁨이다.

우리는 평생 해본 적 없는 약속을 했다. 신뢰와 사랑으로 약속의 증거를 삼았다. 삼십 삼 년간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관계를 정립했다. 새 관계가 주는 힘으로 남은 생을 함께 하려 한다. 서로를 통해 무언가를 더 이루고 성취하는 인생도 좋지만, 서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언제나 더 기뻐할 수 있는 부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근사한 식사를 맛있게 나눠 먹었다. 밥도 맛있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러고는 값비싼 선물을 교환하는 대신에, 서로에게 글을 써 주기로 했다. 기념일을 맞아서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같은 생각을 하며 글을 쓰면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30분간 타이머를 맞춰 두고, 아무 말도 않은 채 서로에게 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할 시간도, 고칠 시간도 없다. 다만 그 순간 마음에 담긴 말을 볼펜으로 꺼내 놓을 수 있을 뿐이다. 종료를 알리는 진동소리도 못 듣고 썼다. 32분가량이 되어서야 글쓰기는 중단되었다. 글을 교환해 읽으며 서로에게 감사하고,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약속을 기억하고, 함께 살아갈 날을 기대하는 시간이었다. 

글도 쓰고 마음도 전하고 기념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글을 선물 받으니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없다. 글 속에 담긴 마음을 고이고이 껴안고, 글을 잘 모아서 기념 삼고 증표 삼아야겠다. 앞으로 우리의 12월은 비슷한 의미를 하나 둘 더해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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