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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 Mar 10. 2020

쑨이 이야기

이야기 - 1.

터벅터벅 발걸음에 검정 고무신 위로 뽀얀 흙먼지가 내려앉아 있다. 국민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6리가  조금 안  되는 길이었다. 대추나무 옆 큰 나무 대문을 열면 ' 끼익~' 묵직한 소리가 집에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집에는 노 할머니가 계실 때도 있었지만 밭일을 하시느라 보통은 아무도 맞이해 주는 이가 없었다.


허기진 배를 잡고 부엌문을 열면 부뚜막 한쪽에 엎어져 있는 바가지안에는 식은 밥이나 누룽지가 있었다. 부엌 바닥에 아무렇게나 쭈그리고 앉아 고추장을 넣고 슥슥 비빈 밥 한술 뜨고 부엌문을 나서면 수돗가 펌프 근처 감자 한다라가 눈에 들어왔다.  그 감자 한다라의 감자 껍질을 다 벗기는 게 그날 쑨이의 오후 일과였다.

벗겨도 벗겨도 줄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시간들이 흘러 어느덧 쑨이는 중학생으로 진급하였다. 중학교는 걸어서 왕복 40리로 4시간 정도의 시간을 매일 통학시간에 들여야 했고 달라진 것은 검정고무신에서 끈 3개를 엮을 수 있는 검정 운동화를 신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통학길은 여름이면  아침이지만 벌써 땀으로 축축해진 교복으로 하루를 시작하였고 걸어도 걸어도 꽁꽁 언 발이 따뜻하게 풀리지 않는 겨울 하굣길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추위와 찬바람을 가르고 오느라 애쓴 노고에 쓰러지듯 누워 잠들기 바빴다.


적막하고 고요한 시골의 긴 겨울밤은 싸늘한 바람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이웃집 개 짖는 소리 외에는 달리 할 것도 어떤 재미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적막함이 너무나 지루했는지  밤이 되면 쑨이 아버지는 동네 아저씨들과 삼사오오  모여 막걸리 한잔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젠가부터 간단한 노름을 하기 시작하였다. 단순한 내기식의 장난으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그러기에 겨울밤은 길었고 노름이란 새로운 놀이에 정신 팔리는 짓거리가 봄, 여름, 가을 땀 흘려 인내심과 싸워 얻게 된 수확물을 걷어들일 때의 그 맛과는 비교가 안되게 강렬하고 자극적이 맛이었다.

쑨이 아버지의 놀이는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되었고 더 이상 간단한 놀음이 아닌 집안의 땅문서가 오가는 위험한 놀이로 변질되면서부터 쑨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우는 소리가 건넌방 이불을 덮어쓰고 누운 쑨이의 귓가를 자주 괴롭히게 되었다.


쑨이네는  동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생활의 넉넉함이 있는 집이었다.  제법 땅이 있었기에 수확철에는 인부 여럿을 두고 일해야 할 정도의 형편이었고 그 덕에 학교 다니는 동안 쌀과 보리가 반씩 섞인 도시락을 싸가는 건 당연시 여기며 지내왔다.  한 여름에도 밭에서 걷어들인 콩으로 쑨이 어머니는 직접 두부를 만들었고 그 두부를 달군 솥뚜껑에 들기름을 두른 뒤 앞 뒤 바싹 구어낸다. 그렇게 구어낸 두부를 간장독에 넣어 띄우고는 맛이 베게끔 한 후 짭쪼름해진 두부를 건져내어 손가락 한마디보다 조금 작게 썰어 참기름, 다진 마늘, 고춧가루를 넣어 한껏 무친 것이 도시락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 번은 쑨이 친구 중 형편이 좋지 않던 친구의 도시락이 쌀밥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무슨 날이냐고 물으니 그것은 쌀밥이 아닌 자세히 보니 디딜방아로 껍질을 벗긴  쌀이나 보리 대신의 옥수수 알밥이었고 호기심에 한 입씩 바꿔 먹어본 맛은 모래알처럼 뭉쳐지지 않고 입속을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영양가 있는 도시락을 싸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쑨이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들고나가시던 땅문서의 땅 덕분이었다. 남의 땅을 빌려 소작하는 집안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점심 도시락을 쑨이는 그 땅 덕에 싸올 수 있었고 자식 입에 들어가는 그 귀하디 귀한 근간을 놀음에 정신이 팔린 쑨이 아버지가 잡고 흔드니 쑨이 어머니도 더는 참지 않고 밤이면 놀음하는 쑨이 아버지를 찾아내어 끌고 나오시곤 하셨다.


그런 싸움이 몇 해로 이어졌고 그러는 사이 아무도 쑨이의 고등학교 진학 문제와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어떠한 조언을 해주지도 않았다.


쑨이 위로는 오빠가 셋 있었다. 아들을 귀하게 여기던 시절 집안의 사내아이들이니 오빠들의 진로와 학비문제가 먼저가 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분위기였고 동네 계집아이들 중 몇 명밖에 진학 못한 중학교를 다녔던 쑨이도 그 이상의 진로를 바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저 밤마다 아버지 놀음으로 인한 어머니와의 싸움이 어서 끝났으면... 이곳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만이 유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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