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화가전 전야
“이름 빨리 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대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전시장이 위치한 거리의 이름을 응용해서 카퓌신(한련화)이라고 이름 짓는 건 어때요?" , "꽃을 상징물로 쓰고요."
“그건 우리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 거라고 보기 힘들지 않아?”
각자 생각은 있었지만 누구도 이게 맞다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침묵이 흐르고 다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결국 의견 조율에 실패하고 무명 화가 협회 라는 정말 무색무취한 명칭으로 전시회가 열려버렸다.
문제는 이름만이 아니었다.
첫 전시는 사진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약 30명의 화가가 참여했고 160점이 넘는 작품이 걸렸다.
살롱전 보다 15일 앞서 개막한 것은 낙선작으로 오해받는 것을 피해서였다.
이때 모네는 <인상, 해돋이>를 내걸었다.
결국 이 새로운 예술 운동에 이름을 지어주는 역할은 르 샤리바리지에 전시평을 실었던 루이 르루아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는 조제프 뱅상이라는 가상의 인물과 함께 이 전시회를 보러 간 상황을 연출하면서 모네의 그림과 제목을 인용하며 비평했다
“이건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단지 인상에 불과하다.”
화가들은 경멸적으로 들리는 인상 이라는 용어를 거부했지만 비평가들은 이 단어를 좋아했고 계속해서 사용했다. 몇 달 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로써 인상주의가 공식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비평가들의 혹평처럼 첫 전시회의 결과는 참담했고 이중 일부는 살롱의 전통적인 노선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가장 낙관적인 화가들 마저 이 결과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전시회 후 르누아르의 집에서 열린 총회에서 대부분 회원이 무명 화가 협회 해산에 찬성하기도 했다.
르펠티에가 11번지의 뒤랑 뤼엘의 화랑 3호실에서 2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피사로는 연합 이라는 이름의 협회를 창립하여 인상주의 화가들을 재집결하려 했지만 무산되었다.
이번에도 화가들은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거나 정의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전시회는 일군의 화가들이 개최한 전시회라는 아주 평범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회풍에 있어서도 드가는 실내와 인물중심이었고 모네와 르누아르는 여전히 빛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카유보트는 <마루를 깎는 사람들>을 내걸었다.
그래도 일부 비평가는 화가들의 양식적 혁신을 부각하거나 드로잉과 색채를 이용하는 방식에 대해 상세히 다루어 주기도 했다. 이들이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삶에서 얻은 영감을 새로운 모티프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는 사실로 평가해 주기도 했다.
2회 때 사용한 전시장의 사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재정적 여유가 있던 카유보트의 도움을 받아 큰 아파트를 임대해서 세 번째 전시회를 기획한다.
이때 화가들은 장시간의 토론을 펼쳤다. 르누아르의 반대를 무릅쓰고 처음으로 인상주의 전시회로 명명하기를 결정한다.
작품에 있어서 모네는 <생라자르 역> 연작으로 증기와 빛이 섞이는 장면을 화면에 밀어 넣었다.
르누아르는 <그네>와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같은 작업을 통해 사람과 빛이 동시에 움직이는 순간을 그려냈다.
전시회 이름은 같았지만 그 안에서 그려지는 그림은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드가와 카사트가 중심에 선다.
부친이 타계한 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드가는 동생의 빚을 갚아주느라 재산을 탕진하게 되고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인상주의 전시회는 새로운 구매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작품은 카사트의 <파란 안락의자에 앉은 소녀>처럼 일상의 장면이 전면으로 올라온다.
이 전시회에서 1회 전시회 때의 네 배에 달하는 입장권이 판매되고 참여한 화가들은 고액의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
이 시점부터 전시는 하나로 묶인 집단이라기보다 각자의 관심이 나란히 놓이는 자리로 변해간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이 있었다.
피사로였다.
카유보트와 함께 전시회를 주도한 드가는 이번 전시회를 인상주의가 아닌 독립화가 그룹의 전시회라는 중립적인 이름으로 부르자고 제안했고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이 명칭은 전시회 포스터에만 사용되었고 전시회 카탈로그에서는 여전히 인상주의가 사용되었다.
마네는 여전히 전시회 참여를 거절한다. 르누아르는 다시 살롱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모네는 아직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처음 열렸던 전시회 장소에서 여섯 번째 전시회가 열린다.
드가는 발레리나 연작으로 움직임을 분석하듯 그렸고 카사트는 실내에서의 장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참여 인원은 더 줄어들고 있었다. 카유보트는 전시회 불참을 통보했고 이제 5회 때 참가한 19명의 화가 중에서 13명밖에 남지 않았다.
화가들 다수가 단체 전시회를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 개인전을 열거나 살롱전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했다.
피사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계속 시도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임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들이 오랜 시간 함께 작업을 해 온 친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공동 전시회의 효용에 대해서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이런 부정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유치해 회화 전시회 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을 불태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전시회는 냉혹한 비평과 무관심에 흥행에 실패하고 만다.
반면 이 자리에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쇠라였다.
그는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통해 색을 섞지 않고 나누어 찍는 방식을 보여준다.
붉은색과 초록색 파란색과 노란색을 분리해 놓고 멀리서 하나로 보이게 했다. 빛을 분해해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피사로 역시 이 영향을 받아 같은 실험을 시도한다.
그러나 처음 이들을 향한 평가는 냉혹했다.
“미완성이다” , “대충 그렸다”
하지만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뒤랑-뤼엘 같은 화상이 이들을 꾸준히 지원했고 그림은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누구나 끝이 언제인지 모르듯이 인상주의 전시회는 8회로 막을 내린다.
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 기간 동안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은 이 전시회와 함께 인상주의는 마침내 소멸하고 이제 신 인상주의 혹은 후기 인상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이 그 뒤를 잇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용어들은 인상주의의 첫 번째 양상과 1900년대의 전위예술 사이의 시기를 지칭하게 되었다. 즉, 후기 인상주의는 의식적이고 단일한 운동이 아니라 19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유럽에 확산되었던 일종의 정신 상태인 것이다.
실제로 첫 번째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바로 인상주의 화가 자신들이었다.
이들은 1886년 붜 자신의 양식을 초기의 양식과 차별화하려고 노력하면서 기법과 내용면에서 다양한 해결책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을 이들을 서로에게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인상주의 전시회의 시작과 끝을 보면서 두 가지의 감상이 들었다.
1. 만남과 이별
살아가다 보면 기존의 질서를 깨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려고 모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향점을 완전히 공유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같은 문제를 보고 출발했지만 그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결국 갈라서는 순간을 맞이한다. 나 역시도 사업을 하면서 만난 동업자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상황이 공감이 갔다.
어쩌면 이런 과정은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긴 여행을 가던 중 누군가를 만나서 동행하게 되고 갈림길이 나오면 다시 각자의 길로 가는 것처럼.
2.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마음가짐
인상주의 화가들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보려고 노력하고 고민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결과물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치열한 고민과 갈등의 결과물들이 후대의 미술사에 큰 전환점을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지금도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누군가는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거부하고, 누군가는 그 안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했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자기 방식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했느냐가 아닐까.
후대에 어떤 결과를 남길지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자기 방식으로 풀어보려는 시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