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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by 파랑

다정함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도통 무슨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영화였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7관왕을 한 명작이라는 이야기에 큰 기대를 앉고 영화를 보았는데, 아직까지 저는 예술을 한번에 이해할 수 있는 분석력이 없나봅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감상평은 “이게 뭐야” 였습니다. 어머니의 이마에는 인형눈알이 붙어 있고 딸은 블랙홀처럼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베이글을 데리고 다니는 영화라니. 파리를 코로 들이마신다든가 엉덩이에 트로피를 낀다든가 하는 온갖 말도 안되는 행동들을 통해 멀티버스 점프를 하다니.


이 영화에서 제가 좋아할 수 있었던 포인트는 딱 하나였습니다. 허무주의 속에서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는 그런 메세지요. 이 영화의 배경은 멀티버스로 표현되는 다중우주 입니다. 다중우주에서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모든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세계 속에서 두 주인공 조부 투바키와 에블린 (인형눈알을 붙인 어머니) 은 서로 다른 삶의 태도를 보입니다.


베이글을 데리고 다니는 딸, 조부 투바키는 거대한 악으로 표현됩니다. 모든 우주와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경험해 다중우주의 무한한 힘과 지식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 봐서 오히려 허무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가운데가 뻥 뚤려있는 베이글처럼 모든 것은 부질없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을 만들어 세상 모든것을 파괴하려고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 합니다. “세상은 무의미하게 출렁이는 오물통에 불과하니까 평온을 찾을 곳은 저 베이글 뿐이야” 라며 베이글로 탈출하고 싶어 합니다.


반면, 인형눈알을 붙이며 살던 어머니 에블린은 다정함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딸인 조부 투바키와 다를 바 없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현재의 남편을 선택해 빨래방에서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다른 우주에서의 무수히 많은 삶을 동경하며 정신적으로 파괴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모질게 굴기도 하는 엉망인 인물로요. 하지만 에블린은 그 부족함을 메워줄 다정하고 인내심 많고 너그러운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인형 눈을 물건에 붙이고 다닐 정도로 사소한 장난을 좋아하는 순진한 인물입니다. 누군가가 순진해 보이면 그 사람은 사실 속 깊은 어른인 것이라 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도록 유치하고 가벼운 사람을 자처하는 거죠. 남편도 세상이 잔인하고 우리는 그저 쳇바퀴 돌 듯 살아갈 뿐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 순진해서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반짝이는 눈빛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죠. 인형눈이 타인을 바라봐주는 눈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남편의 사소한 장난을 한심해 하던 에블린은 자신의 이마에도 인형 눈을 붙인 후 타인의 무의미함과 부질없음까지 바라봐주는 존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정함의 전략으로 남편과 에블린은 조부 투바키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됩니다. 엉망이어도 괜찮다고.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고. 악당의 무리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죠. (이 전투? 를 묘사하는 장면이 굉장히 익살스럽고 상상을 초월하니 직접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저희가 사는 세상도 영화속 멀티버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세상 속에서 사는 요즘은 무엇이든 가능하고 어디든 갈 수 있죠. 하지만 사람들의 행복도는 떨어졌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합니다. 손가락 클릭 몇 번이면 무얼 먹든, 어디를 여행하든, 어떤 것을 배우든, 다른 누군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느껴져서 일까요. 매일 치열하게 일궈낸 나만의 작은 성장이 다른 사람의 영웅담에 비해 초라하게 느껴져서 일까요. 개개인의 가치는 자꾸 작아져 간다고 느낍니다. 인터넷으로 인해 가능성의 세계는 멀티버스처럼 무한히 확장되어갔지만 그럴수록 개개인의 의미와 가치는 더욱 작아져 가는 것 같습니다. 누구 하나 특별하다고, 의미 있다고 볼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허무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 빠지기 쉬운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구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화에서는 타인을 보듬어주는 인형 눈 이라고 말해준 것 같습니다. 스스로도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타인에게로 눈을 돌려 타인의 무의미함도 보듬어주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서로의 무의미함을 보듬어 주는 다정함 속에서 공허함 속 소중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정함이 세상을 구하진 못해도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구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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