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세상은 슬픈 걸까? 제4편-
“신입생 강석준입니다. 저는 서울 태생입니다. 앞으로 잘 지내봐요.”
순정만화에서 나올법한 자연스러운 곱슬머리에 하얀 얼굴, 우뚝 선 코, 마치 혼혈인 것처럼 얼굴은 작고, 키는 크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다니 나는 조금 놀랐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다. 60명의 신입생 중 8명만이 여자다. 그나마도 이번 연도에 여자가 가장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학생회 선배들은 남자만 있다.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린다. 다갈색의 피부를 가진 키가 큰 남자다.
“저는 최강민입니다. 저는 광주 민중항쟁을 계승하기 위해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했어요. 지금도 독재 정권이, 자기 잇속만 채우는 그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어요. 많은 선배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의 하나가 되고 싶어요.”
강민이라고 말한 그는 또박또박 당당하게 말했다. 광주항쟁이라면 5.18 폭동이라고 뉴스에서 들어본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 수업할 때 바람에 매캐한 냄새가 자주 실려 왔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우리나라가 잘못되었다는 것쯤은 알았다. 나는 강민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신입생인데도 강민은 정확히 현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는 웃지도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떨려오고 얼굴이 붉어졌으나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채민희입니다. 저의 출산지는 해남이구요, 재배지는 서울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은 출산지라는 나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언젠가 교회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소개하는 것을 들었을 때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동기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해남은 정확히 엄마의 고향이다.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고도리.
땅 끝이라 알려진 해남이지만 바다와는 거리가 있는 곳이다. 엄마는 어렸을 때 바다를 가보긴 했지만 멀어서 자주는 아니라고 했다. 걸어서 2시간도 넘게 걸렸다고 한다. 엄마에게 해남은 아름답게 기억되어있다. 해남 읍내에는 영화관이 있어 엄마는 친구들과 함께 여러 번 갔었다.
7남매의 셋째로 태어난 엄마는 다정한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다. 엄마는 어렴풋하게 아버지를 기억했다. 신학문을 배우고 다정했었다고. 옛날 분 같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가 일곱 살 때 한국전쟁이 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엄마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어 엄마는 그토록 힘든 삶을 살았어도 낙천적이었던 것 같다.
10번에 가까운 출산을 스물두 살부터 마흔 살까지 했고 40대부터 당뇨와 신장병이 있어서 항상 약을 복용했다. 아빠가 폭력적, 권위적으로 대하는 데다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고 또 일하면서도 엄마는 웃고 우리를 돌봤다.
하지만 선함에 대한 보답은 모진 인생이었다. 생각해보니 사실은 착하게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힘든 일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힘든 삶이 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엄마는 스물두 살 때 충북 산척으로 갔다. 좋은 집으로 시집갈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혼수로 집안의 논이 더 팔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해남에서 충청도로 먼 길을 떠났다. 중매를 선 사람은 도시라고 했으나 가보니 산골이었다.
시아버지는 시대에 맞지 않게 조선시대처럼 상투를 틀고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는 서당의 훈장이었다. 아빠는 4형제의 장남으로 엄마보다 4살이 많은 26살, 당시로서는 노총각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식 날 처음 만났다. 그날 엄마의 사진을 보면 굵은 파머를 하고 비단옷을 입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도 힘든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외할머니는 딸을 시집보내고 마음이 불편했나 보다. 4년 만에 찾아가서 다시 데리고 왔다. 힘들게 살고 있는 딸과 사위에게 해남으로 가자고 설득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집에서 일만 죽어라고 하고 있던 부모님은 딸 하나(그때까지는 언니만 있다)를 데리고 해남으로 왔다.
아빠는 당시 8개월이던 아들을 잃은 지 얼마 안 된 터라 마음이 흔들렸나 보았다. 장녀에 이어 2년 만에 낳은 아들은 튼튼했고 잘 자랐다. 커다란 고무대야에 8개월이던 아들을 넣어놓고 엄마와 아빠는 농사일을 했다. 왜 죽었는지 무슨 병인지 아무도 몰랐다.
다시 해남으로 돌아온 엄마는 이제 좀 마음이라도 편해지나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시댁에서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괴롭혔다면 해남에 온 이후로는 남편이 괴롭혔다. 아빠는 그전까지는 보여주지 않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처가살이에 대한 피해의식을 엄마에게 풀었다. 외할머니가 별다른 뜻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닌 것도 다 거슬렸고 자기를 종처럼 부린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화풀이는 엄마에게 돌아갔다.
“처가 산다고 네가 나를 깔보는 거냐?”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았다. 해남에 산 지 2년 만에 내가 세상에 나왔다. 아빠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백일기도를 드린 후였다.
내가 채 돌이 되기도 전에 아빠는 처남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해남에서도 농사를 지어 겨우 먹고살 수만 있을 뿐 돈을 벌 길은 없었다. 엄마의 오빠가 마포 우체국을 다녔기 때문에 서울로 가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먼저 올라갔다. 엄마는 아빠가 서울로 오라는 전보 치기만을 기다렸다. 몇 달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일곱 살이 된 언니와 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를 업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마포 우체국을 찾아야 했다.
나는 고향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으면 항상 해남이라고 대답했다. 사실이기도 하지만 두 살 때까지만 살았기 때문에 기억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나는 해남이 나의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엄마의 고향이니까. 나는 엄마가 좋다. 나는 해남에서 태어난 것을 남몰래 자랑스러워하곤 했다. 나는 남도의 뜨거운 태양처럼 강인하고 싶었다.
“민희구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 좀 바꿔주렴.”
해남의 큰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를 불러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전화를 받은 엄마도 목소리가 떨려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한 여름인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잠시 밖으로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켰다.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도 몇 년 전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외할머니는 달랐다. 외할머니는 훨씬 더 가까웠고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슬비가 오는 것도 잊은 채 놀이터의 벤치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가 일하러 가고 없던 빈자리를 채워주었던 외할머니.
이제 다시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매니라고 부를 사람은 없다.
몇 달 전 외할머니가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엄마는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러 해남에 간다고 했다. 나도 대학에 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시간이 났다. 엄마와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먼 길을 갔다. 고속버스에서 엄마는 엄마의 어린 시절과 해남에서 태어난 나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나는 자주 콧등이 시큰해왔다.
해남읍내에 있는 큰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침상에 앉아있다. 할머니는 내손과 엄마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전과 달리 힘이 없었다. 살도 많이 빠지신 듯 말라 보였다.
“애구 내 새끼, 매니(민희) 왔구나.”
할머니는 약간 목이 쉰 것 같다. 환자복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었을 텐데 아무런 기억이 없고 할머니의 마른 얼굴과 쭈글쭈글하게 변한 할머니의 손, 그리고 마지막에 엄마와 나를 바라보며 어서 가라고 손을 내젓던 모습만이 떠오른다.
우리가 가려고 하니까 할머니는 침대 밑을 한참 뒤져서 무엇인가 꺼내서 내손에 꼭 쥐어 주었다. 그것은 외할머니가 언젠가 필요할 때 쓰려고 아껴서 깊숙이 넣어두었던,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만 원짜리 한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