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아가는 새는 폭풍우를 피하지 않는다 제2편-
“나, 선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나는 웃어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거니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왜냐하면 윤은 두 살이나 어리니까. 나에게 전혀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하면 후배인 윤이 상처 받을지도 몰라서 나는 최대한 기분 상하지 않도록 돌려서 얘기를 했다.
“너는 그냥 가을을 타는 거야. 네가 힘들어서 옆에 있는 누군가를 생각하게 된 걸 거야.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왜 그랬지 하게 될지도 몰라.”
윤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곧 졸업이었고 진로 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4학년 가을, 나는 학생회 일과 아르바이트에 여전히 바빴다. 갑자기 윤은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다음 해 정치대 편집부장 자리를 윤에게 부탁했던 터라 그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싶었다.
학번도 나이도 2년 후배인 윤은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 술집에 가도 차를 마셨다. 그래서 윤과 함께 얘기할 때면 항상 카페에 갔다.
그날도 우린 정문 옆의 카페로 갔다. 2층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무슨 이야기냐며 묻는 내게 윤은 가볍게, 장난치듯이 말한 것이다.
이상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그날 이후 자꾸만 윤을 찾게 됐다.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나는 등교만 하면 행정학과 사무실부터 들렸다.
「윤아, 2시까지 정치대로 와.」
행정학과 사무실의 칠판에는 빽빽한 다른 사람들의 메모 사이에 나의 메모가 항상 섞여있게 되었다. 정치대의 칠판에도 여성스러운 글씨체로 쓰인 윤의 메모가 자주 적혀있었다.
「민희 누나. 나 열람실에 있어요.」
우린 함께 편집부 정기간행물 「길」을 편집하면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윤의 고백 이후에도 우리는 그 일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일하고 대화하고 웃었다.
“행정학과 편집부는 윤이랑 얘기하면 돼.”
1년 전, 단과대 편집부를 꾸리기 위해 세 과(정치외교, 행정학, 부동산학과)의 편집부장을 만났다. 홍 선배는 각 과의 편집부장을 추천해주었다.
홍 선배의 말에 나는 크리스마스 뒤풀이에 왔던 윤을 기억했다. 나는 그때 윤을 처음 보았다. 1학년인 윤은 보통 키에 마른 체격이고 다갈색 피부에 귀여운 인상이다. 하늘색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감색 정장 바지를 입고 짙은 바다색 모직 마의를 입어 스타일리시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첫인상은 그리 성실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왠지 말만 잘하고 정작 일할 때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윤은 예상과 달랐다. 편집부 회의에 항상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회의를 하면 차례가 오기도 전에 첫 번째로 의견을 말하고 해야 할 일을 제일 먼저 찾아 나서서 했다.
그해 내내 편집부 회의에서 뿐만 아니라 윤과 나는 마음이 잘 맞았다. 알게 될수록 비슷한 점이 많았다. 아버지를 싫어하는 것도 그렇지만 특히 윤은 문학에 흥미가 있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 차별화됐다.
정치대에서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할 사람은 거의 없다. 더구나 생의 이면(이승우),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김형경),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공지영), 깊은 슬픔(신경숙) 등 이런 소설책을 읽고 함께 몇 시간이고 대화할 사람은 윤이 유일했다. 윤은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의 ‘시현’이 자신과 닮았다고 했고 나는 「깊은 슬픔」의 ‘은서’와 내가 닮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둘 다 고등학교 때 문학을 좋아해서 국어국문학과 지망생이었지만 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집에서 등록금을 대줄 수 없는 형편이라 교대를 선택하고 야간을 선택해야 해서 못 갔다. 윤은 고등학교에서 3년 내내 반장과 학생회장을 했고, 문학과 음악을 좋아했지만 아버지가 행정고시를 보라며 행정학과를 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경우였다. 하지만 윤이 아버지 말을 들은 것은 거기까지였다. 학교에 들어와서는 고시는커녕, 사회과학 공부와 학생회 활동에, 학교 수업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복도에서 만나면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하며 오랜 시간 자주 서 있었다. 게다가 「문학과 사회」라는 교양과목을 같이 듣기까지 했다. 같이 리포트도 쓰고 토론했다. 그리고 윤은 나에게 개인적인 고민도 얘기하고 미팅했던 얘기도 하며 연애상담까지도 부탁했던 터였다.
윤은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꺾었다. 각자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 안 이루어진다 할 때마다 아카시아 잎을 뜯자고 했다. 달리 할 일도 없어서 나는 윤이 하는 대로 동그란 아카시아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윤은 나뭇잎을 순서대로 뜯더니 마지막 나뭇잎을 내 눈앞에 들어 보였다.
“이루어진 대요. 하하 무슨 소원 빌었어요?”
“예쁜 내방이 생겼으면 좋겠어. 너는?”
“비밀이죠. 하하”
우린 노를 저으며 양 떼가 천천히 지나는 하늘과 부서지는 햇볕이 잠겨 드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5월의 호수에 몇 개의 배가 떠있다.
1년에 단 한 번, 5월의 학교 축제마다 호수에서 배를 탈 수 있다. 다른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많이 와서 배를 탔다. 누군가가 말했는데 여기서 배를 탄 사람과 결혼한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고 사람들이 재미 삼아 만들어낸 말이지만 꺼림칙했다.
배를 타고 싶었지만 애인이 없던 나는 배를 탈 수 없다. 아무나 와 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3번의 축제가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 4학년이다. 마지막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탈만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제 누구와 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냥 배 타는 것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민철이 배 타러 가자고 졸랐다. 이번 5월 교생실습기간 동안 많이 도와주어서 나는 민철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못 이기는 척, 나는 민철과 함께 배 타는 곳으로 갔다. 민철과 내가 거의 호수 근처에 이르렀을 무렵 후배 윤이 다가왔다.
갑자기 나는 배를 타야 한다면 민철보다 윤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민철은 배를 타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겠지만 윤은 절대 그럴 리 없을 테니까. 윤은 나와 엮일 일이 전혀 없다. 윤과 나는 배를 타러 갔고 민철은 실망 속에 돌아갔다.
여름방학에도 민철과 나는 티격태격하며 같은 집행부에서 지내고 있었고 강민은 술독에 빠진 몇 주 후 군대에 갔다.
“그거 뭐예요?”
“그냥. 무슨 티켓인가 봐.”
내가 〈양심수를 위한 시와 문학의 밤〉티켓을 만지고 있자 윤이 물었다. 홍 선배는 나에게 2장을 주며 가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별 생각이 없다. 딱히 같이 갈 사람도 없고 갈 기분도 아닌 것 같다.
“오! 같이 가 달라는 거예요?”
나는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잠시 주춤한 사이 윤이 티켓을 낚아챘다.
“2장이네. 내가 같이 가줄게요.”
윤은 선심 쓰듯 말했다. 나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가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다.
그날 밤, 양심수의 밤에는 당대 인기 최고의 가수 김종서가 나와 그의 히트곡 「겨울비」를 불렀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안치환이 나왔다. 마지막에 나온 노래, 김남주의 시에 안치환이 곡을 붙인 「저 창살에 햇살이」를 윤과 나는 함께 따라 불렀다.
내가 손을 내밀면 내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이
내가 볼을 내밀면 내 볼에 와서 따스워지는 햇살이
저 창살에 햇살이
깊어가는 가을 따라 자꾸자꾸 자라나
다람쥐꼬리만큼 자꾸 자라나
내 목에 와서 감기면 누이가 짜준 따스한 목도리
내 입술에 와닿으면 그녀와 주고받던 옛 추억의 사랑
저 창살에 햇살이 저 창살에 햇살이
양심수의 밤이 끝나고 나오자 눈이 가득 쌓인 풍경이 우리를 맞았다. 눈은 말 그대로 퍼붓고 있다. 마침 윤이 우산을 펼쳤다. 워낙 건망증이 심했던 나는 그날도 우산이 없다.
“같이 써요.”
윤은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미 눈이 많이 내려 거리에 소복이 쌓여있다. 바람이 불지 않아 하얀 눈이 사뿐히 지상에 내려앉았다. 마치 포근한 하얀 레이스 커튼이 지상을 향해 드리우는 것 같다.
우산 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옆에 있는 윤의 어깨가 포근해 보였다. 나는 윤의 팔에 팔짱을 꼈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나와 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하얀 눈이 쏟아지는 거리 위로 발맞춰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