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아가는 새는 폭풍우를 피하지 않는다 4편-
학생회관 중앙무대에서는 풍물패 공연이 한창이다. 하얀 민복에 검은 조끼를 입고 노랑, 파랑, 빨강의 삼색 띠가 펄럭인다. 풍물패는 동그랗게 모아졌다가 다시 두 줄로 흩어지고 꽹과리와 북의 힘 있는 가락이 강당을 가득 채운다. 사람들의 머리가 박자에 따라 흔들린다.
공연을 하고 있는 풍물패 옆에 커다란 깃발이 보인다. 「노동자 풍물패 아침소리」라고 신영복체로 쓰여 있다. 공연하는 풍물패 뒤로 커다란 현수막이 바닥까지 내려와 있다. 「총학생회와 함께하는 농촌 노동자와 대학생과의 만남」, 개막공연으로 풍물패 공연이 진행 중이다.
“갱갱 개개갱 개개개개 개개갱”
이제 공연은 절정에 이르렀다.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과 함께 빠른 이체 가락이다.
나는 말뚝이 회원들과 함께 중앙무대에서 장구를 매고 가락을 친다. 15명 정도 되는 말뚝이 회원이 거의 다 왔다. 공연장에는 노동자와 학생,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몇 백 명은 되어 보였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서 풍물공연을 하다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보는 첫 공연이다.
2년 전, 나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나도 기뻤지만 엄마는 진짜 좋았나 보다. 한낮에 맥주를 사 왔다. 시청에서는 발령이 많이 밀려있다고 했다. 반찬 회사, 출판사, 신문사 등 많은 알바를 하며 발령을 기다렸다. 합격하고도 1년 반이 지나서야 구청에 배치되었다.
처음 배치된 곳은 서울의 중심에 있는 용산구의 동 주민 센터였다. 나의 일은 세무담당이었다. 행정직은 필수로 수학이 시험과목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수학을 피하기 위해 세무직으로 시험을 보았다. 세무직은 수학 대신 부기가 있었지만 이것은 암기과목이라 내겐 쉬웠다.
출근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업무분장은 형식에 불과했다. 세무업무 말고도 민원 업무 전체를 하는 것이 내 업무였다. 인감, 주민등록, 전입신고 등 창구에서의 일을 모두 다했다. 하루 종일 주민등록표를 복사하고 인감을 떼었다. 대학 졸업한 지 1년밖에 안 지났었고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출퇴근 시간만큼은 정확히 지킬 수가 있었다. 나는 드디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때는 아르바이트하느라 동아리를 할 수 없었지만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풍물은 내가 대학 들어갈 때부터 하고 싶었던 거였다. 벼룩시장 동네 광고란 작은 네모 칸에 「풍물교실 신입회원 모집」 광고가 떴다. 장소는 영등포에 있는 큰 교회 지하 강당이었다.
첫날, 나를 포함해 7∼8명 정도의 신입회원이 왔다. 직업은 다양했다. 은행에서 일하는 시설 관리업체 직원들 세네 명, 회사원 세네 명, 그리고 나(공무원)였다. 풍물강사는 주 강사 1명 보조강사 1명 총 2명이었다. 둘 다 지하철 노조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오랫동안 풍물패를 해온 것 같았다.
풍물 강습은 일주일에 두 번 화, 목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었다. 모두 처음 해보는 거라 서툴렀지만 우린 열심히 했다. 남녀 비율은 반반쯤 됐다. 강습은 삼 개월 동안 하게 되어있고 마지막 주는 졸업 공연으로 계획되어있었다.
내가 풍물을 배운다니까 윤도 가겠다고 했다. 나는 공무원 된 지 1년이 되었고 윤은 대학 4학년이었다. 우리는 사귄 지 1년이 넘었다. 나는 두 번째 강습 날 그를 데리고 갔다.
“저는 윤민혁이예요. 채민희 선배의 후배라서 따라왔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나는 민혁(윤)에게 우리가 연인이라는 것을 말하지 말고 선후배 사이라고만 밝히라고 말했다. 처음 풍물패를 하면서 사람들과 선이 생기는 것이 싫었다. 학교에서도 씨씨(campus couple)들은 다른 학생들과 허물없이 지내기가 어려웠다. 벌써 그 사람 자체를 대하기 전에 커플이라는 것부터 보이기 마련이다. 나는 풍물패 속에 커플이 아닌 나 자신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민혁도 동의하여 자기 집에서 한 시간 반 이상 걸리는 곳에서 풍물 강습을 같이 하게 됐다. 나는 20분 정도 버스 타면 집이었다.
우린 열심히 배웠고 삼 개월 후 민혁은 상쇠가 되고 나는 장고를, 은행 관리 업체에서 온 정훈은 북을 들고 신입 회원들과 졸업 공연을 했다. 정훈은 나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나와 각각 회장과 총무를 맡아서 서로 친해졌다. 정훈은 착하다는 KS인증마크가 있다면 제일 먼저 붙여야 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조금 마른 외모에 말이 없었지만 누구에게든 친절했다.
“생일 축하해!”
정훈은 커다란 연보랏빛 장미 한 다발을 내게 안겨주었다. 풍물교실을 한지 한 달쯤 되었을 때 나의 생일이었다. 풍물 교실에서 다섯 명이 마음이 맞아 같이 자주 놀았다. 정훈, 연주, 나, 민혁과 보조 강사였던 은석이었다. 연주는 성격이 매우 활달하여 분위기를 좋게 했다. 농담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서 모두들 좋아했다. 우리는 풍물교실이 끝나면 같이 맥주도 마시고 공원에도 가고 주말에는 놀이공원에도 갔다. 내 생일날은 우리 모두 밤을 새우고 부스스한 머리로 출근했다.
“이거 뭐예요? 여자 옷인데?”
언젠가 정훈의 자취방에 갔던 적이 있었다. 정훈의 집에서 나온 여자 블라우스를 보고 우리들은 모두 웃었다. 정훈은 혼자 자취하고 있었다.
정훈은 그때쯤 생애 처음으로 2,000CC 스포티지를 사서 풍물 교실 때마다 뭉친 우리 다섯 명을 모두 차례차례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가장 먼 민혁의 집 구리시부터 시작해서 신림동 은석 선배 집, 구로동 연주네, 광명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면 거의 12시가 되었다. 정훈의 집이 부천이었기 때문에 우리 집과 가까웠고 그래서 나는 항상 맨 마지막에 내렸다. 민혁과 나는 단지 친한 선후배처럼 연기했지만 늦은 밤이 되면 나는 정훈의 차에서 민혁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곤 했다.
삼개월간의 풍물교실이 끝날 무렵 민혁과 나의 비밀도 밝혀졌다. 우리가 너무 친해 보여서 사람들을 속일 수가 없었다. 나는 친했던 정훈에게 소개팅을 주선했다. 우리 구청의 동기 언니였다. 정훈과 선미언니는 3개월 후 결혼했다.
삼개월간의 풍물 교실이 끝난 후 은석은 여기서 활동하는 풍물패가 있다며 하고 싶은 사람은 하라고 했다. 민혁과 정훈은 하지 않았고 나와 연주만이 풍물패를 하게 되었다. 나는 풍물에 빠져 있었다. 풍물은 몸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무언가 영혼을 지배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주도 대학교 때 풍물패를 했었다. 풍물패 이름은 「아침소리」였다. 나는 열심히 아침소리에도 참여했고 그 후 우리 학교에서 열린 공연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연주야 빨리 올라와.”
은석이 소리쳤다. 해가 막 바다에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소래포구의 철교 위에서 석양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손을 흔들었지만 결국 연주는 고소 공포증 때문에 올라오지 못했다. 그날 소래포구로 갔던 야유회에서 신우의 유머에 우리는 계속 깔깔댔다. 나중에는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왔다.
모임 날 교회 강당 지하에 가면 윤호는 항상 먼저 와 있었다. 혼자서 옷이 다 젖도록 장고를 치고 있었다. 면 티의 등 부분이 젖고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나도 조용히 장고를 가지고 와서 함께 치곤 했다.
아침소리 회원들은 평범한 20대의 직장인들로 지하철 직원들이 많았다. 상큼이라고 불렸던 유머러스한 신우, 항상 진지하고 가락을 힘 있게 치던 윤호,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고 영어나 외래어를 절대 쓰지 않던 민속 지킴이 태준, 왈가닥 공주 연주까지 우리는 풍물 모임뿐만 아니라 야유회며 엠티도 자주 다녔다.
풍물은 하면 할수록 열정이 느껴졌다. 무엇엔가 미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중의 하나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2년 동안 풍물패 모임에 거의 빠지지 않았다.
은석과 풍물패 회장인 세진이 나를 불러 근처 카페로 갔다. 은석이 말했다.
“다음 연도 풍물패 회장을 네가 맡아주었으면 해.”
이번 연도에도 총무를 했었다. 민혁과의 데이트도 모임이 없는 날만 잡았다. 나는 모임이 있는 날에는 퇴근하자마자 와서 강당 청소를 했었다. 당연히 풍물패 회장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다음에 할 이야기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선배, 저는 못해요.”
“왜?”
“저 내년에 결혼해요. 1월 12일이요.”
은석과 세진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삼 개월 후 결혼해서 구리시로 가야 했다. 우리 집에서는 2시간 반이 더 걸리고 용산의 직장에서도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 곳, 더구나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부모님은 민혁이 공익으로 군 복무 중이고 또 내가 공무원이니까 만약 아기가 생긴다면 키울 사람도 필요하지 않냐면서 같이 살자고 했다. 시댁으로 들어간다면 풍물패는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달라질 터였다.
엄마는 같은 공무원하고 결혼했으면 하고 바라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민혁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봄부터 4년간의 연애기간 동안 민혁과 나는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헤어진 적은 없었다. 주말에는 항상 만났고 주중에도 가끔 만났다. 만날 때마다 영화며 노래방이며 호프집을 갔다. 헤어질 때마다 아쉬웠다. 집에 와서는 또 두 시간이 넘도록 팔이 아프게 전화통화를 했다.
민혁은 대학 4년을 마치고 1년 전 공익요원으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산불을 감시하는 산림감시요원으로 구리시청으로 매일 출근했다. 민혁은 군 복무 중이라 아무런 생계수단도 없었다. 민혁은 자기가 자리 잡을 때까지 3년 정도 더 기다리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공무원 3년 차였다. 스물일곱 살, 친구들이 모두 결혼하는 때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결혼을 안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회분위기도 그렇고 그때는 결혼이 선택이라는 것을 몰랐다. 어차피 결혼할 거라면 지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민혁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와 같이 살 수 있다면 단칸방이라도, 시댁에 같이 살더라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동화를 믿었던 걸까? 아니면 순진했던 걸까?
시댁에 들어가서 살게 된다면 구리시에서 용산까지 출퇴근 시간으로 왕복 4시간이 걸린다. 그것을 감수하고라도 매일 아침을 민혁과 함께 맞을 날을 기다렸다. 그 아침은 그의 시부모님과도 같이 맞을 것이라는 것을 모른 채.
나는 엄마처럼 불구덩이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처럼 아무것도 몰랐다. 백수와의 결혼, 알코올 중독이라는 민혁의 아버지, 45세밖에 안 되신 시어머니, 같이 살기 때문에 프라이버시가 허용되지 않는 아파트도 모두 핑크빛 유리 돔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