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슬프지 않은 세상을 위해

더 이상 슬프지 않은 세상을 위해 - 3편

by 설하

“할머니.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예요?”

별이가 외할머니에게 물었다. 엄마의 칠십 칠세 생신 모임을 끝낸 뒤였다.

“지금. 좀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 좋아. 젊었을 때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사느라 아무 생각도 못했어. 지금은 그래도 이렇게 손녀랑 이야기할 시간도 있네. 지금이 젤로 좋아.”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나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젊었을 때 엄마의 사진을 보면 안방마님같이 동그랗고 고운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힘든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얼굴에 남았다.

별이는 대학 1학년 역사수업 과제로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와 인터뷰하기를 받았다. 누구를 인터뷰할까 고민하다가 가장 가까운 외할머니를 고른 것이었다. 외할아버지와는 대화가 안될 것 같고 (외할아버지는 귀가 어둡다) 친할머니는 한국전쟁 이후 태어났기 때문에 안됐다.

한 시간 반에 걸친 인터뷰 중 마지막 질문이었던 가장 행복했던 때에 엄마는 지금이라고 답했다.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동안은 느낄 수 조차 없는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저 집 짓고 다니는 놈들은 쌍놈들이다. 홍가네 놈들”

엄마가 18살쯤 되었을 무렵 엄마의 할머니가 말했다. 1960년대 초 한참 건설 붐이 일어서 무조건 집을 지으면 돈이 되는 때였다. 그때 엄마는 아직 결혼 생각도 없었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상놈이 되더라도, 집을 짓더라도 나는 꼭 돈 벌어서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켜야지.’

가족부양보다 족보와 죽은 사람(조상)에 대한 예의에 더 관심 있는 아빠 때문에 무던히도 고생하면서도 엄마는 어릴 때 결심대로 다섯 남매를 교육시키려 애썼다.


“병원에서 간경화란다. 그게 뭐냐?”

2년 전,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상하게 배가 불러오자 엄마는 근처의 내과에 가셨다. 내과에서는 간경화 같다며 큰 병원으로 가라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병원에 입원할 짐을 챙기라고 했고 엄마는 곧 돌아올 거니까 간단한 짐만 챙겼다. 우리는 서둘러 종합병원으로 엄마를 입원시켰다.

엄마의 배가 아기를 임신한 것처럼 커져있었다. 의사는 검사와 진찰을 마친 후 따로 나를 복도로 불러냈다.

“너무 늦었어요. 이미 간경화가 진행이 많이 돼서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네? 무슨 말씀 이신지?”

“말 그대로입니다. 몇 개월 일지 모르겠네요.”

의사는 젊다면 간 이식하는 방법이 있지만 엄마는 나이가 많아서 그럴 수가 없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술을 먹지도 않았고 별다른 증세가 없었다. 게다가 정신은 너무도 맑았다.

나는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엄마가 퇴원하면 산책하라고 노인용 보행기까지 주문했다. 의사가 틀린 경우도 많지 않은가. 입원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갑자기 병원에서 중환자실로 옮긴다는 전화가 왔다. 넷째 은희가 주로 엄마와 병원에 있을 때였다.

중환자실에서 3주 차가 되었을 때 나는 한참 슬이의 고3 입시로 바빴다. 그날도 슬이의 실기고사 때문에 아침 일찍 대학교에 데려다주고 오전 면회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갔다.

엄마는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내가 오자 눈을 떴다.

“나 정말 죽을 것 같다. 여기 중환자실에서 계속 있는 다면 미칠 것 같아.”

나는 일반병실로 나가도록 의사와 면담을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마침 토요일이라 전담의사는 없고 당직의사만 있어서 만났으나 월요일이나 되어야 알아볼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다시 엄마에게 갔다. 엄마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민희야. 나 수술할 수 없다니? 내가 돈이 좀 있는데. 집에 쌀독에 돈 100만 원 넣어놓았는데 수술할 수 없을까?”

나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나이가 많아서 수술할 수 없다고, 의사는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다고 그렇게 말을 하지 못했다. 엄마는 애지중지 키운 결혼 안 한 막내아들까지 있었다. 나조차도 엄마가 죽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니 엄마는 더했을 것이다.

그날 밤 엄마가 돌아가셨다. 입원한 지 7주째, 중환자실로 옮긴 지 3주째, 결석 기계를 돌린 지 5일 만이었다. 믿기지 않았어도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멍해졌다. 인간의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정말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세상의 모든 불효자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후회했다. 나는 울었지만 엄마는 돌아올 수 없었다. 엄마가 쌀독에 넣어놓은 100만 원은 두 달 뒤 아빠의 84세 생일잔치에 쓰였다.


7시 알람이 울린다. 난 정지를 누르고 또다시 잠에 빠진다. 세 번째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겨우 침대에서 내려와 분주해진다. 어느새 네 마리의 고양이가 내 발밑에 맴돌고 있다.

“우리 아기들. 밥 달라는 거로 구나. 귀염둥이들.”

나는 밥 먹을 시간이 없어도 우리 아기들 입에 사료 들어가면 그걸로 뿌듯하지. 민혁은 오늘 야근이라 잠들어있고 별이와 슬이도 코로나로 학교를 가지 않아서 자고 있다. 겨우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선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거의 정각에 사무실에 들어선다. 거의 25년이 넘도록 하는 직장생활인데도 이 출근시간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동료들은 모두 아침형 인간이 되었는데도 왜 나는 계속 저녁형 인간인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아침형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나는 어릴 때부터 밤만 되면 눈이 초롱초롱해졌었다.

약간 잠이 덜 깬 것처럼 멍한 상태에서 오전 근무를 하고 점심시간이 되면서부터 나는 또 똘망똘망해 진다. 고양이들 사료와 물을 챙겨서 사무실 옆 공원으로 간다. 급식 터에 밥을 준다. 날이 좋은 요즘 같은 가을에는 점심을 먹고 공원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산책을 한다.

여기 공원에는 일곱마리 정도의 고양이가 살고 있다. 요즘 자주 마주치는 고양이들은 2마리는 치즈이고 한 마리는 삼색이, 나머지 한 마리는 카오스다. 2주 전쯤 카오스가 잔디밭에 꼼짝도 안 하고 앉아있는 게 보였다.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얼굴이 다친 것 같았다.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잡으려 했으나 놓쳤다. 며칠을 점심시간마다 찾아다녔는데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 나는 우울했다. 카오스가 어디선가 죽어버렸을 것만 같았다.

며칠 후 다시 카오스가 나타났다. 얼굴이 많이 나아있었다. 나는 닭고기를 던져주었다, 카오스는 명포수처럼 발로 닭고기를 잡고 재빨리 입에 문후 날쌔게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기를 세 번 했다. 잘 먹어서 다행이었다. 자세히 보니 카오스는 눈이 동그랗고 귀엽게 생겼다.

“카오스. 내일 또 보자. 내일 또 와야 해.”

한시가 다되어서 나는 손을 흔들고 사무실로 향한다.


‘엄마. 엄마는 만날 수 없지만 나는 여기 이 불쌍한 아이들을 돌볼게. 엄마도 불쌍한 사람들 지나치지 못했잖아. 시장에서 무릎에 타이어를 받치고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면 엄마는 꼭 지폐를 주었던 거 나 기억해. 동전도 아니고 꼭 지폐였던 거.’

그때 우리는 기초수급자로 지정될 만큼 못살았는데도 엄마는 그런 사람들을 지나치지 않았다. 엄마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적당히 할 수는 없잖아.


세상이 슬픈 것은 행복한 사람들보다 행복한 동물들보다, 슬픈 사람들이 슬픈 동물들이 더욱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세상이 행복해지려면 행복한 사람들이, 행복한 동물들이 많아지면 되지 않을까?

나로 인해서 먼지만큼이라도 세상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

한순간이라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어제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더 이상 슬프지 않은 세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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