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슬프지 않은 세상을 위해- 2편
“민희씨, 나랑 갈 때가 있어.”
퇴근한 나를 붙잡고 민혁은 갑자기 집을 나왔다. 민혁은 운전을 하고 나는 별이를 안고 20분쯤 간 것 같다. 남양주의 경찰서 게시판에 붙어있는 자기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경찰 합격 공고였다. 나는 게시판 한복판에 작은 글씨로 적힌 윤민혁이라는 세 글자를 확인했다. 우리는 별이를 번갈아 안으면서 웃었다. 세 돌이 채 안되었던 별이도 엄마 아빠의 웃음에 까르르 따라 웃었다. 3년간의 외벌이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반 지하로 분가한 지 한 달 만에 민혁이 경찰시험에 합격했다. 민혁은 몇 달 되지 않아 남양주의 한파 출소로 발령이 났다. 나도 주민 센터에서 구청으로 발령이 났다. 우리는 분가한 지 일 년 만에 구청 근처의 14평짜리 아파트로 이사 갔다. 또다시 전세자금 대출을 잔뜩 받아서 가는 거였지만 그래도 구청에는 직장어린이집이 있었다. 게다가 작아도 아파트 6층이어서 햇볕이 잘 들었다.
시댁에서는 민혁이 직업을 가졌으니 이제 둘째를 가지라고 성화였다. 어렸을 때 5남매라서 힘들었기 때문에 나는 한 명 만을 낳고 싶었다. 하지만 별이를 낳아보니 너무 예뻐서 한 명 더 낳고 싶긴 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아기를 낳는다면 많은 부분을 시댁에 의존해야 한다. 전적으로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일 년이라도 육아휴직을 해서 내손으로 아기를 키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경찰이 된 지 얼마 안 된 민혁과 외벌이로 3년을 살았던 나는 별로 돈을 모으지 못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래서 육아휴직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둘째는 미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그 정도의 돈은 모이지 않았다. 결국 육아휴직의 꿈은 접게 되었고 4살 터울로 둘째 슬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별이 에미야, 셋째를 낳아야 한다. 우리는 아들을 낳아야 해,”
슬이가 백일도 되기 전에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은 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댁에서는 노골적으로 아들을 원했었다. 나는 민혁에게 확실하게 말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셋째를 낳는 일을 없을 거라고. 사실 직장 생활하면서는 두 명도 버거웠다. 내가 강경하게 나오자 민혁도 어쩔 수 없이 시부모님에게 더 이상 부담 주지 말라고 말했다. 말도 안 됐다. 21세기에 아들이라니. 누구보다도 내가 그 피해자였다. 우리 아버지가 100일 동안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해서 태어난 게 나이지 않은가. 그래서 줄줄이 딸을 낳고 마지막에 낳은 아들은 게임만 하고 있지 않은가.
시누이가 결혼하고 아기를 갖게 되면서 나는 시댁을 떠날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시댁에서 10분 거리의 집에 살았다. 아침에 두 명의 아기를 시댁에 맡기고 출근했다. 이제 시누이의 아기까지 태어나면 어머니는 3명의 아기를 돌봐야 한다.
“어머니, 애기 세 명을 어떻게 돌봐요? 제가 친정 근처로 이사 갈게요.”
“무슨 소리니? 나는 세 명도, 네 명도 돌볼 수 있다.”
사실은 내가 너무 힘들었다. 민혁은 반대했다. 시어머님은 음식을 잘해서 저녁을 다해주었다. 우리는 평소에는 시댁에서 저녁을 먹었고 주말에만 밥을 해 먹으면 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음식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뇨와 신장병이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해했다. 우리는 가끔 친정집에 가면 외식을 했었다.
민혁은 지금은 식비가 거의 들지 않지만 친정 근처로 가면 식비가 많이 들 거라고 했다. 게다가 그 음식 만드는 것도 내가 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가야만 했다. 시아버님의 눈치를 살피고 어머님의 잔소리를 계속해서 듣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일을 더하고 힘든 것이 나았다.
민혁과의 공방 끝에 결국 우리는 구청에도 이동 신청을 하고 민혁의 경찰서도 전근 신청을 냈다. 민혁은 그냥 돈 문제였지만 나는 죽고 사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운 좋게도 두 어달 만에 둘 다 친정 근처의 구청과 경찰서로 전근이 되었다. 우리는 엄마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18평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친정 쪽으로 이사 와서는 마음은 편해졌다. 대신 예상했던 대로 몸이 힘들었다. 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했다. 엄마는 몸이 좋지 않아서 우리 집에 오면 하루 종일 TV를 보고 잠을 잤다. 자연히 돌이 갓 넘은 슬이도 할머니 옆에서 TV를 보다가 잠들었다. 내가 집에 도착하면 엄마는 부스스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직장이 끝난 6시부터 나는 집안일과 아이들 돌보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일하고 집안일에 아이 돌보기에 바빠 12시까지 쉴 틈이 없었다. 힘든 것은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쯤 민혁이 형사과로 들어갔다. 그도 출근해서 새벽까지 일하기 일쑤였고 비번 날에도 일을 해야 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그래도 아이들은 함박꽃처럼 무럭무럭 커갔다,
너무 힘들었던 것일까? 민혁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학교 때부터 술 마시러 가자고 하면 차를 먹자던 민혁이었다.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왔다. 다음날 정신도 못 차리고 기억도 하지 못했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알코올 중독이던 아버지를 싫어했던 그 아니었던가. 한잔만 마셔도 온몸이 빨개져서 온 세상 술을 다 마신 것처럼 변해서 술을 싫어하던 민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그렇게 마시고 새벽 4,5시에 들어오고 어떤 날은 아침에 들어오기도 했다.
“너 진짜 미쳤니? 아빠 닮아가는 거야? 술은 마실 수 있어, 그렇지만 어느 정도 마셔야지. 이건 아니잖아.”
“미안해. 담에 안 그럴게.”
민혁은 이렇게 말했지만 모든 알코올 중독자들처럼 생활은 반복되었다. 나는 싸우고 싸웠다. 그렇게 직장과 집안일에 힘들었는데도 어떻게 또 싸울 힘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싸웠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술을 싫어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직장생활이 힘든 것을 민혁은 술로 달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셔버리게 될 정도까지 마셨다. 그게 문제였다.
민혁은 너무 힘들어서라고 변명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힘들었지만 나는 직장 회식에 참가할 시간도 없었다. 나 또한 직장생활에, 퇴근해서는 집안일과 아이들 돌보기에 앉아있을 틈이 1초도 없었다. 나에게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아이들 때문에 항상 동동거렸다.
나는 나대로 나만 힘들게 아이들을 키우는 것 같고 민혁은 민혁대로 힘든 형사 생활을 이해해주지 않는 내가 서운했나 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우리는 자주 싸웠다.
10년의 시간이 흘러 형사를 그만두고 파출소로 나오게 되면서 민혁은 술을 전처럼 마시지는 않았다. 비번 날 쉴 수 있게 되면서부터 민혁은 운동과 공부를 시작했다. 헬스를 다니고 평소에는 퇴근하고 도서관에 다니면서 공인중개사며 주택관리사 등 자격증 공부를 했다.
나도 둘째 슬이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집에 더 이상 일찍 들어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슬이의 영어학원은 5시부터 수업을 시작해서 9시가 다되어야 끝났다. 어차피 6시에 퇴근해서는 저녁을 해줄 수가 없었다.
“슬아, 현금카드를 줄테니까 이걸로 저녁 사 먹어. 절대 굶으면 안 돼. 알겠지?”
나는 신신당부를 했지만 슬이는 편의점에서 우유나 빵을 사 먹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아 나는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어차피 집에서 밥을 해주어도 잘 먹지 않았다.
이제 퇴근 후 집에 달려가지 않아도 된 이후, 그때부터 나는 내가 보였다. 벌써 40이 훌쩍 넘어있었다. 28살에 결혼해서 슬이가 중학교를 들어갈 때까지의 17년의 세월이 지나가 있었다. 나에 대해서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이 17년이었다. 17개월이 아니었다.
물론 잘 자라준 별이, 슬이가 고마웠지만 내 인생은 어떻게 지나간 지 알 수 없었다. 직장을 다니긴 했기 때문에 맞벌이로 집도 장만했지만 나는 왠지 세월을 잃어버린 것 만 같았다.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우연히 스쿼시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정말 빠져버렸다. 이런 세계가 있었는지 몰랐다. 스쿼시를 하면 5분 만에 온몸에 샤워하듯 땀이 흐른다. 그렇게 한 시간을 뛴 후 하는 샤워는 산타클로스의 선물처럼 좋았다. 매일매일 선물을 받는 것 같았다.
학교 때 체육시간에 벤치에 있는 것을 좋아하던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스쿼시 강의는 물론 주말에도 나는 회원들과 스쿼시를 쳤다. 나는 운동으로 몸이 건강해져 갔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다양한 세계를 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