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를 두번이나 죽여버린 사건에 대하여

사르트르와 먹던 회를 바다에 던져본 적 있나요

by 준형박

몇일전 욕지도 선착장에 앉아 고등어회를 먹고 있었다.


그날따라 바람이 많이 불었고 고등어 회 한점이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주변에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다에 잠긴 그 고등어회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이 고등어는 헤엄치지 못하고 가라앉을까?


곱씹어 생각해보니 내가 초래한 상황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다.


나는 이 고등어를 내 손으로 두번이나 죽여버렸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저마다의 의지로 물살을 거스르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가 되는 순간 고등어가 가졌던 바닷 속 모든 의지와 서사는 처참히 도려내진다.


그리고는 오직 본인이 가진 영양과 식감이라는 도구적 가치만 남겨진다.

토막나버린 고등어에게 바다는 더이상 가능성이나 생명력의 공간으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한때 가장 자유로웠던 곳에서 가장 무기력하게 가라앉고 있는 모습은


나에게 환경의 변화가 아닌 본질의 변화가 떠오르게 만들었다.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문장이다.


내가 무엇으로 태어났든 내가 어떻게 삶을 정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고등어는 물고기라는 종을 넘어서는 하나의 자유로운 실존이자 의지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회가 된 순간 그는 '식재료' 또는 '안주' 라는 고정된 본질에 갇혀버렸다.


규정된 본질만 남았을 때 고등어 회에게 바다는 더이상 능동적 배경이 아니다.


존재의 핵심인 실존 즉 ' 의지 ' 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차가운 바닷물이 채워져


그를 더 깊은 바닷속으로 끌어내렸다.


다시 돌아간 바다는 귀환이 아니었다.


이미 잃어버린 본질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너무 잔인한 고문이었다.


그를 일으켜세워주던 거친 파도는 이제 그가 더 빠르게 가라앉게 도와줄 뿐이다.

나는 이 고등어를 두번이나 죽여버렸다.


처음은 내가 회를 주문하는 목소리로 그의 '존재'를 토막내버렸고


두번째는 내 손의 회전으로 그의 '본질' 까지 빼앗아버렸다.


존재의 상실이란 단순히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나를 나(self)이게 만들어주던 의지를 꺾어 '사물'의 길로 침몰해가는 과정이다.




회를 다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바다 앞에 묶여있는 강아지를 발견했다.


오랜시간 서서 강아지와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삶의 반경이 5M인 이 강아지가 정의한 바다는 어떤 곳일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곳


그렇다면 고등어가 헤엄치던 1년이 이 강아지가 살아있을 10년보다 의미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적어도 그에게는 '의지' 라는 것을 체험할 기회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당분간 회를 먹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 자신을 먹는 기분이 들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