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패전 이후 혼란을 마주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유럽 대륙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거대한 전쟁(The Great War)', 혹은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왜냐하면 그 규모와 방식, 성격에서 예전의 전쟁과는 완전히 달랐었거든요. 옛날의 기사도 정신은 없어지고, 기관총 / 독가스 / 항공기 / 전차 / 철조망 등이 등장하면서 완전한 "총력전"이 벌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을 잠시 간결하게 살펴보면, 전 세계에 펼쳐진 드넓은 식민지를 바탕으로 한 영국 / 프랑스, 그리고 동쪽의 대국인 러시아 제국 / 바다 건너의 잠재력 있는 강국인 미국으로 이뤄진 협상국과, 유럽의 중앙의 강국 독일 제국과 전통의 강호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으로 이뤄진 동맹국의 대결이 주를 이뤘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한 1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위시한 협상국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적국이었다가 전쟁 도중 연합국으로 전향한 이탈리아, 지구 반대편에 선은 "영국 - 일본 동맹"을 바탕으로 한 일본도 승전국의 반열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독일은 황실이 무너진 뒤 국가정체성의 기반인 동프로이센 지역을 폴란드에게 빼앗기고,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며 해체, 오스만 제국도 제국이 멸망하며 튀르키예로의 건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전후(戰後)의 교통정리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인 독일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전쟁배상금을 물어낼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그 유명한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의 군사력을 제한함으로써 다시금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독일을 억제하려고 합니다. 이미 전쟁말기, 협상국의 해상봉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독일로서는 이러한 전쟁배상금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였고, 이로 인하여 독일 국내는 정치적 / 경제적 혼란을 겪고 맙니다.
경제사를 공부하다 인플레이션 부분을 공부하게 되면 항상 등장하는 초 인플레이션, 그것이 바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였던 이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주춤해진 경제에 동력을 불어넣기 위해 독일은 수많은 화폐를 찍어내었는데, 실물경제의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유통되는 화폐의 수량만 늘어나게 되자 자연스럽게 인플레이션이 오게 되었고, 물론 과장된 예시이겠지만 "이발소 한번 가는데 리어카에 돈을 싣고 가야 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유명하니까요.
이러한 경제적 문제와 더불어, 정치적 문제도 발목을 잡았습니다. 전후 독일에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은, 제대로 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좌 / 우익 간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습니다. 좌익은 사회주의 사상을 퍼뜨리며 사회주의 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을 개시하였고, 1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들이 주를 이룬 우익의 "자유군단(Freikorps)"은 이들과 심심치 않게 교전을 벌이면서 갈등은 심화되었습니다. 중앙정부의 통치력도 미약하여, 어느 한 지방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면 해당 지역에 주둔한 군부대에 "부탁"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의 시대상에 얼마나 혼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상황에 한 가지 더 특이한 사항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배후중상설", 혹은 "등뒤의 칼"이라고 하는 썰(?)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경우, 협상국의 군대는 독일 내부 본토로 진격해 들어오지 못했고, 이는 독일 본토는 전쟁으로부터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고 비교적 고스란히 보존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온 국토가 유린되고, 최후까지 소련군과 혈전을 벌인 "베를린 전투"가 있었던 2차 세계대전과는 정말 다른 양상이었지요.)
이러한 배경으로 말미암아, 독일국민들 사이에서는 이 "등 뒤의 칼"이론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독일 국민들 입장에서는 "우리의 용맹한 군대는 아직 최전선에서 적과 최후결전 중이고, 우리 본토에 적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항복을 하다니.. 이건 유대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뒤에서 칼을 꽂은 게 분명해..!"라는 생각이 만연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독일 국민들 내부에서 전쟁 말기의 회의론이나, 기나긴 해상봉쇄로 인한 경제적 피로도가 누적된 것도 사실입니다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일 남부의 뮌헨 지역에서 어느 한 남자가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이 남자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최전선에서 열심히 싸웠으며, 심지어 적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시력을 잃을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관에게,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이라는 이름의 어느 한 정치단체의 집회에 참석해서 이 단체에 대해 감시한 뒤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어느 허름한 술집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막상 그 감시를 해야 하는 정치집회에서, 그는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별 쓸데없는 이야기들, 바이에른 주의 독립이 어쩌고... 전쟁을 직접 현장에서 겪은 그로써는 비겁한 이상주의자들의 속 빈 강정 같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의 불만은 어느새, 그가 연단에 올라서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완성되고야 맙니다.
뮌헨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그는 성토합니다. 이 혼란은 우리 조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두 세력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소리 높여 외칩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노조운동 등을 해가며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는, 내부에서 폭발직전이던 일반국민들의 분노 배출구를 마련해 줌으로써 나쁜 의미로의 단결력을 이끌어냅니다. 그의 연설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그러한 입소문으로 인해 그가 등장한다는 날이면 뮌헨의 맥주홀은 인파로 금방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당 내부에서 그가 가진 권력은 점차 강력해졌고, 이윽고 당을 혼자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초창기 창설멤버도 아닌 그가, 창설의 주요 멤버들을 모두 제치고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당 이름을 바꿉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즉 '나치(Nazi)'당의 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이름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였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친위부대이자 정치깡패인 "돌격대(Sturmabteilung, SA)"를 창설하고 권력의 기반을 늘려갔으며, 이윽고 뮌헨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 권력을 쟁취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 영감을 얻은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세력을 이끌고 뮌헨에서 폭동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할 과감한 계획을 세우고 맙니다.
그러나, 이러한 히틀러의 폭동계획은 뮌헨의 군사령부의 빠른 진압작전의 돌입, 그리고 수뇌부의 좌충우돌, 우유부단함이 맞물려 실패하고 맙니다. 뮌헨 주둔군의 사격으로 시위대는 수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히틀러도 어깨가 탈골된 채로 도주했다가 체포되어, 반역죄로 재판에 서게 되는 상황에까지 내몰리고야 맙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재판을 통해 일약 전국구 스타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재판을 받는 내내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고, 자신의 특기인 연설능력을 통해 자신의 삐뚤어진, 그러나 확신에 찬 논리들을 쏟아내어 심지어 판사마저도 그에게 감화가 되어버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도탄에 빠진 조국을 위해 답답한 마음에 이런 일이라도 벌인 것이며, 이 조국을 진짜로 걱정하고 위하는 것이 누구이냐, 는 등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판사들이 이에 감화되었고 징역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최상위의 대우를 받는 등 히틀러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6개월이 지난 후, 바이에른 주 정부는 그를 석방하는 대형사고(!)를 치고야 마는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치당은 와해됐겠지?"라는 이유에서였지요. 결국 히틀러는 이렇게 출소하게 되었는데, 나치당은 그의 수감기간 동안 약해진 것은 사실이나 와해되지는 않았습니다. 히틀러는 이 사건으로 큰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더 큰 무대에서 놀기 위해서는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방의 작은 세력이었던 나치당으로서는 정권을 잡는다는 것이 하루아침에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경제상황과 혼란스러운 국내정치 상황을 교묘히 이용함과 동시에, 극우세력과 중도 우파세력까지 끌어들여 그 세를 점차 불려 나갔습니다. 1930년 총선에서는 무려 20%에 가까운 의석을 가져갈 정도로 성장합니다.
이윽고 1932년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36%의 득표율로 최종 2위의 성적을 얻은 것에 이어 총선에서 나치당도 37%로 원내 제1당으로 등극하고 맙니다. 갖은 방해공작과 정치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1933년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내각 수상에 임명되면서 합법적으로, 정상적으로 집권하는 데에 성공하고 맙니다.
이후,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일어나 정국은 뒤숭숭해졌고, 이 사건의 주범을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몰아가면서 점차 여론마저 나치당 쪽으로 기울고야 맙니다.
결국 非나치 우파 세력과의 협조를 통해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한 히틀러와 나치당은, 그 유명한 "수권법(Ermächtigungsgesetz)"을 통과시킴으로써 의회의 입법권을 행정부에 부여, 의회 민주주의의 기틀을 완전히 파괴하고 독재국가로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제, 독일은 나치당과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히틀러는 부르짖었습니다. 다시는 독일의 역사에 "항복"이라는 단어는 없을 것이라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아, 유럽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1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