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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 그려진 풍경

기억의 물결, 내면을 그려내다

by 나리솔


물로 그려진 풍경


기억이라는 것은 정돈된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물건들이 아니야. 그것은 차라리 깊고 고요한 호수와 닮아 있지. 그 수면은 지극히 평온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잠겨버린 도시들과 오래전 잊힌 보물들이 소리 없이 잠들어 있잖아. 때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에서 예측하지 못한 과거의 조각들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해.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떠오르는 물고기처럼 말이야.


우리 인간들은 그 호숫가에 바스락거리며 서 있는 갈대와 같아. 하늘과 구름의 반영을 보고, 변화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지만, 우리의 뿌리는 이 차갑고 어두운 물속에 단단히 박혀 있지. 흔들리는 갈대 줄기가 위로는 유연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지만, 그 아래 뿌리는 결코 호수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삶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근원, 즉 기억이라는 호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아. 그 차가운 물속에는 우리 존재의 토대가 되는 수많은 경험과 감정의 침전물들이 쌓여 있으니까.


우리가 살아낸 매 순간, 하루하루는 결코 고정된 한 장의 사진이 아니야. 그보다는 호수 위로 떨어진 한 방울의 먹물과 더 가깝지. 처음 떨어지는 순간에는 선명하고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이내 수억 개의 다른 물방울들과 섞이며 번져나가.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최초의, 오리지널 먹물 한 방울이 어디에서 끝났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게 돼. 기억은 점차 흐릿해지고, 본래의 선명함을 잃어버린 채 보편적인 윤곽만을 남기게 되지만, 이 모든 먹물 방울들이 모여 호수 전체를 새로운 색채로 물들이듯이, 우리의 기억들도 그렇게 서로 뒤섞여 지금의 우리를 빚어내지. 어쩌면 그 흐릿함 속에서 비로소 얻는 새로운 의미와 깊이가 있는 건지도 몰라.


우리의 과거는 우리가 기억하는 그대로가 아니야. 과거는 오히려 우리를 오늘을 그리는 화가에 가까워. 그 화가는 기억의 호수에서 물을 길어와 색을 풀어내고, 우리 삶의 색채에 부드러움을 더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아. 어떤 날은 눈부신 햇살 같은 희망의 색을, 또 어떤 날은 고통과 상실의 깊은 그림자를 더하며, 끊임없이 우리라는 캔버스 위에 새로운 풍경을 그려내지. 과거의 조각들은 현재의 감성과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촉매가 되기도 해.


그런데 왜 어떤 순간들은 수정처럼 맑게 남아 있는 걸까? 그것들은 마치 개울 바닥에 박힌 단단한 돌멩이와 같아. 시간의 끊임없는 흐름(개울)이 그 위를 씻어내지만, 결코 휩쓸어가지 못해. 그 돌멩이들은 견고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물이 맑을 때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곤 하지. 진정한 행복의 순간이거나 혹은 깊은 상처와 고통의 순간들, 그것들은 특별한 무게를 지니기에 시간의 물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존재 깊숙이 박혀 있어. 상처가 아물어 갈 때, 그 자리에 남은 단단한 굳은살처럼, 아픔은 때론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그 경험들이 우리의 내면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어주기도 하니까. 그 빛나는 돌들은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소중한 이정표인 셈이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은 새벽녘 기억의 호수 위로 피어나는 안개와 같아. 안개는 지평선을 가려 내일의 선명한 윤곽을 볼 수 없게 만들지. 하지만 이성의 태양(자각)이 더 높이 솟아오르면, 안개는 서서히 흩어지고 다시금 고요하고 끝없는 하늘의 반영을 우리에게 보여줘.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돼. 모든 두려움은 잠시 피어나는 안개처럼 덧없는 것이며, 우리 안의 고요함과 평온은 언제나 그 자리에 빛나는 태양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우리의 삶은 마치 흙으로 빚은 도자기와 같아. 해마다 시간이라는 장인(Master)이 그 위에 무늬와 균열을 더하지. 우리는 이 균열들을 흠집이라 여기며 슬퍼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은유적으로 본다면, 이 균열들은 도자기에 역사를 부여하고, 독특함과 진정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붓 자국과 다름없어. 이러한 '흠집'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똑같고 텅 빈 그릇에 불과했을 거야. 그 균열 속으로 빛이 스며들어올 때, 비로소 도자기는 내면의 빛을 발하며 더욱 깊은 이야기를 품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상처와 아픔 또한 우리를 더욱 풍요롭고 독창적인 존재로 완성시켜 주는 소중한 과정인 거지. 때로는 가장 깊은 균열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 피어나기도 하니까.


나는 나의 호수를 바라봐. 그 호수는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파도쳐 흔들려. 빛을 품고 그림자를 드리우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그리고 나는 깨달아. 진정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호수의 깊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간의 바람이 호숫가의 갈대와 고요히 어우러져 노니는 것을 허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말이야. 그 깊이 속에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내면의 풍경들이 잠들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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