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풍경을 넘어, 행동으로 증명되는 삶의 진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양면성, 즉 극성이 존재한대. 빛과 어둠, 뜨거움과 차가움, 북쪽과 남쪽, 천사와 악마처럼 말이야. 음양처럼 모든 것엔 순환이 있고, 위아래, 좌우의 대비도 늘 함께하잖아. 이런 이치들은 오래전부터 알아차려지고 기록되어 왔지만, 우리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또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것 같아. 세상을 오직 한 가지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늘 왜곡될 위험이 커. 하지만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입체적인 시야와 명확한 좌표가 생겨나고, 우리는 현실을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단다. 여기에 세 번째 차원, 즉 전체적인 관점까지 더해진다면, 우리는 모든 상황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더 신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거야.
한 사람의 행동이라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양쪽에서 모두 다르게 해석될 수 있어. 마치 ‘백군’ 편에서도, ‘적군’ 편에서도 제각기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기에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과 감정들은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 어떤 의미의 좌표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경험이 되기도 하고, 혹은 부정적인 경험이 되기도 한단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는 거야.
모든 사람은 현재 세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자신만의 해석 방식을 선택하게 돼. 그것이 적극적인 행동의 입장이든,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을 정당화하는 입장이든, 혹은 적은 노력으로 큰 결과를 기대하는 입장이든 말이야. 그러니 어떤 행동의 이유만으로 진실을 찾아내기란 정말 어렵지.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단 하나의 진정하고 절대적인 진실이 있다고 단정하는 건 불가능해.
오직 한 가지, 절대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실'뿐이야. 의견은 정반대로 바뀔 수 있지만, 객관적인 현실은 결코 바꿀 수 없거든. 강물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면, 지형이 이미 그렇게 형성된 이상 그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리 내면세계에서는 현실이 심하게 왜곡될 수 있고, 그때는 사람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생기게 돼.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바라볼 때는 그의 말이나 의미 부여보다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게 훨씬 객관적이야.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입장에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를 봐야 하는 거지. 그래야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단다. 반면에 행동의 동기나 의미, 그리고 그 사람 스스로가 설명하는 이유는 늘 추측에 불과해. 단 하나의 사실 위에도 수많은 '왜 그랬을까?', '무엇을 위해 그랬을까?'라는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자체를 정반대로 바꾸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길은 단단하고, 하늘은 푸르며, 물은 축축해. 모든 게 너무나 단순하잖아. 물이 마를 리 없고, 하늘이 아래로 내려올 리 없으며, 땅이 위로 갈 리도 없듯이 말이야.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삶을 위해 충분히 엄격하게 정해져 있어. 다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느낌'과 '의견'만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지.
의견은 늘 흔들리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변한단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있는 한, 자신의 감정과 기분, 관계와 경험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기회는 언제나 있어. 그것은 습관의 문제이고, 세상을 향한 태도, 자신을 향한 태도, 그리고 타인에게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해. 하지만 결국 운명의 저울 위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 행하는 그 일'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