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재료 : 부끄러움 1개, 우울 1/2잔, 용기 2스푼
레시피 한마디 : 부끄러움을 성장의 기억으로 만들기
어떤 기억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뇌를 빨갛게 익혀버린다.
일상에 불쑥 날아들어 간질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 그런 기억들에는 주로 부끄러움이 녹아들어 있다.
나는 청년기 초기까지 누군가의 앞에 나서는 것이 늘 자연스럽지 않았다. 가능한 조용하게 상황을 관망하는 것은 나란 사람의 핵심 매뉴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끔 용기가 솟구칠 때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망신을 당하곤 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부끄러운 기억 속에는 꼭 누군가 함께 있다. 뜻밖에 용감했던 나와 이내 당황으로 물드는 내 표정, 그리고 그보다 더 당황한 사람들. 그 생생한 장면이 떠오를 때면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가 이중으로 두들겨 맞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런 부끄러움의 순간을 차분히 모른 척해주는 조금 더 어른들인 여러분의 배려가 없었다면 나란 존재는 새까맣게 타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비웃음이 더 나았을까 이따금 생각해 보지만, 그럴 때마다 역시나 애써 참아주신 어른들의 다정함에 감사하게 된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기억들은 인이 박힌 듯 고스란하다. 일상의 사건들은 마치 종을 울리는 당목처럼 묵직하게 날아들어 기억을 울린다. 그러면 내 몸과 마음은 고무망치로 얻어맞은 무릎처럼 저항할 수 없이 어딘가로 튕겨 오르고 마는 것이다.
부끄러운 기억의 반작용으로 누군가는 더 깊숙하게 안으로 내려 꽂히고, 누군가는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후자의 사람인지라 타고난 성향에 비해 밖으로 잘 나돌며 살고 있다. 내향적인 성격에 맞지 않는 도전을 우악스럽게 하다 보면, 양파처럼 그 기억 위에 또 다른 수치심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간다.
오늘 마음 텃밭에서 알싸한 향기를 내는 부끄러움이 제철을 맞이한 듯 제법 튼실히 잘 자랐다. 익히면 달콤한 맛을 내는 양파처럼, 부끄러움도 열을 가하면 좋은 추억으로 익어간다. 그래도 안 해본 것보단 낫다며, 꽤 현명한 척도 할 수 있고 말이다. 부끄러운 기억을 좀 파내고 새로운 속을 채워 바삭 구우면, 나름 괜찮은 원동력이 되곤 한다.
부끄러움은 그냥 다루기에는 너무 향이 강하다. 눈물이 울컥 올라오기도 하고 코가 찡해지기도 한다. 너무 감성적으로 변하기 전에 차가운 이성으로 살짝 씻어내면, 감정에 붙어 있던 작은 반응들이 함께 흘러나간다. 잘 씻어내지 않으면 나중에 흙 씹는 기분이 날 수 있으니, 5분쯤 차분히 매운맛을 다스려보자.
‘시작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지’ 생각해 보는 건 언제나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머물면, 실패한 나로 남는다. “정말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건 남았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하나씩 발전시켜 나가면 된다.
이렇게 점차 강화되는 과정은 오븐이나 프라이팬에 재료를 굽는 것과 비슷하다. 재료 본연의 맛이 응축되며 변하고, 더 강렬해지니까 말이다. 오늘은 마음속 오븐에 천천히 시간을 들여 구워보기로 한다. 그 긴 세월, 내가 부끄러움에서 피워낸 능력들을 떠올리며.
부끄러움의 속을 파낼 때는 눈물이 날 수도 있다. 물안경을 써도 부끄러움의 매운 기는 피할 수 없으니, 그냥 즐기자. 웃는 사람이 이기는 거니까. 기억들을 슬슬 긁어내고, 거기에 맛난 해석을 이리저리 버무려본다. 달콤한 새로운 기억도 좋고, 도전의지도 괜찮다. 나는 덕분에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며 밥벌이하는 직업이 되었으니, 감사한 마음도 좀 버무렸다.
그 위에 살짝 우울감을 얹는다. 적당한 우울은 열에 녹으면 차분하고 고소하며 부드럽다. 나 잘났어요 식의 자기 PR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뭐든 약간의 우울감이 곁들여진 상태가 좋다.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니까.
이렇게 마음을 기울여 부끄러움을 구우면, 기억이 향긋해서 웃음이 난다. 그 향긋함은 아마 지금의 나에게서 나는 것이겠지. 꽤 달큼하고, 부드럽고, 한바탕 추억할 만한 기억으로.
오늘의 부끄러운 기억은 성당에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다 눈앞이 하얗게 변해서 굳어버린 것이다. 어릴 때는 함구증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그날따라 무슨 용기가 났는지 원.
냉담 중이지만 이 자리를 빌려 예수님, 하느님 그리고 신자님들께 슬쩍 사과말씀을 올려본다. 못난 꼴 봐주시느라 고생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