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곶면 해맞이길에 ‘흑구문학관’이 있다. 영일만과 청보리를 소재로 많은 수필을 남긴 흑구 한세광 선생님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평소에 찾는 이가 없는 듯 문학관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헛걸음인가 싶어 발길을 돌리는데 출입문에 붙은 종이 하나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하얀 종이에 한 획 한 획 꾹꾹 눌러쓴 내용은 휴관을 알리며 우편물과 택배는 건너편‘현대슈퍼’에 갖다 달라는 내용이었다. 길 건너를 바라보았다. 지붕은 한 귀퉁이를 바다에 내어주었는지 떨어져 나갔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졌다. 나직이 앉은 담은 어제도 오늘처럼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길 건너 슈퍼는 낡고 허름했지만, 간판은 늘 ‘현대슈퍼’였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현대슈퍼에 배달되었다. 누런 밀가루 포대에다‘콩밭’이라고 꾹꾹 눌러쓴 편지였다. 부모님은 콩밭에 있으니 학교 마치면 미숫가루를 타고 막걸리를 받아 오라는 메시지다. 미숫가루는 집에 있는데 막걸리가 문제였다. 목소리도 굵고 덩치 큰 구판장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면 늘 주눅이 들었다. 매번 외상으로 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루에 놓인 편지는 다양했다.‘부모님은 구판장으로’라는 편지도 있었다. 가방을 마루에 냅다 던져 놓고 구판장으로 달려갔다. 가게에 들어서면 아버지는 막걸리에 취해 불콰한 얼굴로 노랫가락 한 곡조 뽑고, 어머니는 멸치대가리를 절단(?)하고 고추장에 찍어 먹고 있었다. 과자 한 봉지를 가슴에 안고 가게 문을 나설 때, 또 외상일지라도 기분이 좋았다.
달력 한 장을 뜯어 쓴 편지에는 ‘부엌 찬장에’라는 글도 있었다. 찬장에 있는 정구지전을 먹고 열심히 책을 읽으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빈집에서 나는 문고판 로맨스 소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감수성을 깨웠고 얼굴은 빨긋빨긋해졌다. 또 아르센 뤼팽의 소설을 읽으며 탐정가가 되어 지구 몇 바퀴를 돌고 돌았다. 해거름이 돼서야 부모님은 흙 묻은 옷을 털며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는 대문에 들어섰다. 날마다 부모님을 기다렸던 내 유년의 시절이었다.
호미곶에서 서성이던 바람은 청보리밭으로 가고, 우편물은 현대슈퍼로 가는데, 과거로 보낸 그리움의 우편물은 고향 하늘 어디쯤에서 떠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