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스마일> 인도하지 않고 감각하게 하는 것

by Chekhov

해당 글은 <모나리자 스마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6kRGjptxMkbPRcc7IhIgVoRS2Qy.jpg 모나리자 스마일

미켈란젤로와 피카소, 렘브란트와 수틴의 <도살된 소>, 다다이즘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의 조건 같은 미술사적 담론을 보수, 진보 문제로 손쉽게 환원시키는 건 참 단순하고, 싸구려 같은 남녀 간의 연애담도 심드렁하지만, 적어도 좌파 페미니즘, 사회고발물이 흔히 범하는 실수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 좋다. 이런 부류의 영화를 볼 때 가장 역겨운 점은 정의로운 진보적 성향의 주인공이 시대적 압제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알량한 신념 하에 그와 반대되는 보수적인 것들은 전부 악마화하는 것인데, ―물론, 기본적으로 좌파적 성향의 영화기 때문에 종착점은 더 나은 진보적 사고지만(이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캐서린 왓슨과 베티 워렌을 각각 진보적인/보수적인 조언자(간섭자)의 대표로 내세우면서도 절대적인 어느 한쪽이 나머지를 일방적으로 계몽하지 않으며, 양쪽 모두의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는 겸손한 태도를 지녔다.


또, 외부의 불가항력을 인정할 줄 아는 것도 마음에 든다. 캐서린 왓슨은 여성이 결혼도 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해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지만, 1950년대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애초에 그녀 본인도 진주만 공습으로 첫 번째 약혼자와 헤어지고 대학교에 진학했으며, 자신의 꿈을 위해 캘리포니아를 떠나 머나먼 웰즐리에 부임해 폴과 장기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프러포즈를 받기를 꺼리고 이별한 게 아니었나? 지젤 역시 진주만 공습으로 아버지의 자리가 비워진 탓에 나이 든 남성들을 만나며 그 공백을 메우려 했다. 여전히 보수적인 학칙으로 끝맺는 마지막까지, 영화는 굳건한 외부의 불가항력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캐서린 왓슨은 웰즐리 칼리지에 변화를 주기 위해 그곳에 부임했지만, 그녀 자신도 길을 찾고 웰즐리를 떠날 수 있었다.


가정주부의 길을 선택한 조앤이 캐서린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이 두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캐서린과 묘한 대칭을 이루는 조앤이 흥미로웠다. 둘 다 결혼과 커리어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지만, 물리적 거리라는 동일한 이유로 한쪽은 커리어를, 다른 한쪽은 결혼을 선택했다. 집에 머무르는 조앤과 방랑자의 형상으로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캐서린.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그 너머의 것을 느낄 줄 아는 것이다. 깨알같이 삽입된 서브플롯에서 코니가 베티의 말만 믿고 찰리가 바람을 핀다고 착각해 그의 연락을 피하다 결국 재결합한 것처럼. (1950년대의) 올바른 교육이란 교사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학생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한계를 인식하면서) 다른 길이 존재함을 감각시켜 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종반부에 캐서린의 연구실을 수놓은 학생들 각자의 '상자 속의 반 고흐'처럼, 정해진 윤곽 속에서도 다채로운 색이 꽃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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