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전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러닝타임이 155분이나 되는 만큼 하는 말도 참 많고, TVA와 EOE의 조각들까지 끌어오며 최종적으로 모든 에바 시리즈를 소멸시키는 만큼 에반게리온이라는 세계관을 종합하고 종결하는 작품이다. 만약 에반게리온 신작이 나온다면 기존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고 와야 할 것이다.
다카포의 제3마을 파트는 신극장판 시리즈의 여타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학습의 과정이다. 실패로 또다시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 신지는 자신의 감정을 가다듬고 토우지로부터 책임감을, 켄스케로부터는 자신만이 모든 고통을 짊어진 게 아니란 걸 배우며, Q의 레이와 함께 공동체 생활과 노동으로 자신의 실존을 발견한다. 마치 제3마을에는 '파'의 식사 모티프로 쌓아 올린 정(情)과 Q의 신지를 책임감과 속죄의 길로 인도하던 카오루의 사랑이 모두 깃들어있는 듯하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도 그 전조가 보이긴 했지만, 안노 작품에서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보게 된 건 처음이다.
하지만 세계는 여전히 붕괴해 있고 인조인간이라는 운명이 Q의 레이를 제3마을에 머물지 못하게 하며, 에반게리온 파일럿들은 에바의 주박에 매여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어린아이로 남아있다. 대략 40분에 걸친 제3마을 파트가 끝나고 나서야 신지는 빌레의 전함에 다시 타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DSS 초커를 스스로 자신의 목에 찰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에만 천착하는 게 아니라, 우연이 정초한 인연을 믿으며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암(暗)'이 있다면 '명(明)'도 있다.
'반(Antithesis)'이 있다면 '정(Thesis)'도 있다.
Q에서 느껴졌던 변증법적 구조는 다카포에서 사건의 양면성을 동시에 드러내며 보다 명확해진다. '파'의 결단이 낳은 니어 서드 임팩트는 세계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지만, 토우지와 히카리를 부부로 맺어주고 책임감이 결여된 채 정념에 이끌려서만 행동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줬다. 그 때문에 미사토도 복수심이라는 정념에 따라 네르프에서 활동하던 과거와 달리, 속죄를 위해 빌레의 사령관을 맡으며 신지의 책임을 함께 짊어질 수 있던 것이다. 작중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신지는 세계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낸 은인인 동시에, 재차 세계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어 타인의 가족을 죽인 원수인 셈이다.
한편 진정한 어른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다카포의 제3마을 사람들과 미사토를 보고 있자니, 카오루 서사를 위해 인위적으로 세팅된 Q의 납작하고 강압적인 빌레의 선원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잠시 Q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Q의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Q는 카오루의 사랑의 '명'만을 보여주고(혹은 '암'을 흐릿하게만 보여주고) '암'을 다카포로 유예했기 때문에, Q에서 카오루의 사랑은 너무 아름답고 윤리적으로 흠결 없어 보였다.
그런데 다카포를 보고 나니 Q에서의 카오루의 행동의 의미가 좀 더 선명해진다. 예컨대 Q의 리뷰에서 피아노 연탄을 타인과 관계 맺으며 리듬을 맞추는 행위로 이해했는데, 겐도의 회상에서처럼 타인의 존재와 고통을 지워주는 표백제로 이해하는 게 맞겠다. 또 DSS 초커를 자신의 목에 대신 차는 카오루의 행동에서도 책임감의 대리라는 속뜻이 명확히 전해진다. 즉 카오루의 사랑은 타인의 책임을 전부 대리하고, 마치 예수처럼 그로 인한 모든 죄를 대속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급진적 타자 지향적 사랑인 동시에 그만큼 허구적인(imaginary) 것이다. 그리고 다카포에서 신지는 이 허구적인 사랑에서 실재적인(reality) 상보성의 세계로 이행한 것이다.
따라서 Q는 신지가 다카포의 제3마을 공동체를 경험하기 전에 일종의 진공상태에 가까운 상황과 카오루의 사랑을 경험해야만 했다고 본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카포에서 제3마을 공동체와 카오루의 사랑을 견주어보며(실재적/허구적, 상보적/일방향적, 우연적/운명적, 공동체/소실된 타인) 지난 카오루의 사랑을 반추할 수 있었다. (다만 이건 사후적인 해석일 뿐, 다카포에서 이러한 반추의 감각이 영화의 전면에 드러나며 중심적으로 다뤄진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Q와 다카포에서 신지가 '파'의 결단을 돌아봤던 것처럼, 그때는 지극히 옳아 보였던 과거를 반추해 무지를 깨닫는 것이 신극장판 시리즈가 추구하는 성장의 감각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카오루의 사랑의 '암'이 Q의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Q의 실패가 특별한 서사적·주제적 의미로 귀속되지 못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Q와 다카포의 작위적인 환경 조성(Q의 빌레, 다카포의 제3마을)이 서로 심하게 대비돼서 Q에서 다카포로 넘어가는 변곡점이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파'의 결단은 그것의 고유 이미지가 양면성을 내포해 시선을 달리하는 것만으로 '암'을 드러냈던 것과 달리, 카오루의 사랑은 Q에서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그려지고 Q의 실패에서 방점을 제대로 찍지 못해서 시선을 달리하는 것에 더해 루프 설정 같은 여러 인위적인 부연 설명이 필요했다는 점도 아쉽다.
또한 다카포도 Q처럼 난잡하게 쏟아지는 영화의 세부 설정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운 건 여전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늘 그렇듯 분명한 편이다. 특히 후반부 신지의 설득 파트는 카운슬링 구도와 몽환적 연출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고, 영화 세트장 같은 메타적 설정을 끌어온다는 점에서 TVA 23, 24화의 변주에 해당하며 마찬가지로 직설적이다. 대신 TVA에서 신지가 대타자로부터 질문받던 위치였던 것과 달리, 다카포에서 신지는 질문을 던지고 설득하는 위치라는 것이 중요한 차이다.
물론 영화 전체적으로, 그리고 특히 신지의 설득 파트는 흐릿하게만 남아있던 이야기(겐도의 속사정, 카오루의 루프 설정, 아스카의 가정사)를 급하게 결산한다는 인상이 강하긴 하다. TVA도 이런 경향이 있긴 했지만 이 결점 역시 아무래도 Q의 문제로 보인다. '파'도 TVA 8~19화를 변주 및 압축하는 과정에서 아스카 서사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는데, Q에서는 아예 신지와 카오루를 제외한 인물들의 서사를 중단시켜 버렸으니 155분이라는 러닝타임도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그 때문에 TVA 23, 24화와 달리 인물들의 탄탄한 서브플롯이 뒷받침되지 못한 다카포의 신지의 설득 파트가 솔직하긴 하지만, 얼마간 편의적이고 급박하게도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여러모로 Q는 실패작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다카포까지 다 본 시점에서 신극장판 시리즈를 돌아보면, 서사적으로는 신지가 완전한 성장을 이루고 에반게리온이라는 세계관의 종지부를 찍은 완결적인 시리즈지만, 주제적으로는 TVA와 EOE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사실 안노는 (넓게 보면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부터)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나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 <러브 & 팝> 같은 작품에서도 언제나 같은 주제를 되풀이해 왔다. 이건 안노의 한계라고 봐야 할까? 안노에게 의구심이 생기는 동시에, 아직 보지 않은 그의 작품인 <신 고질라>와 <신 가면라이더>, 그리고 차기작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