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와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의 스포일러,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II>의 소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Q의 존재 의의는 오로지 나기사 카오루 서사에 있다. 그것은 신지가 ‘파’에 이어 또다시 자신의 결단에 따른 실패를 겪는 도돌이표 구조를 Q가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Q에서 신지가 ‘파’의 결단의 여파를 알게 된 시점과, Q의 결단이 실패로 돌아간 마지막은 신지의 내면과 세계가 조금 더 무너져 내린 정도의 차이만 존재한다. 그래서 나기사 카오루 서사를 빼면, Q를 건너뛰고 신지가 ‘파’의 결단의 여파를 알게 되는 부분만 다카포의 앞부분에 압축시켜 이어 붙여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정도로 이렇다 할 내용이 없다. 또 ‘파’의 결단이 ‘파’의 ‘변화’를 무화하고 죄의식을 유발해 재차 비슷한 선택으로 신지를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Q가 다소 표독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신지가 실패 이전에 나기사 카오루의 사랑을 겪었다는 것이 ‘파’와의 중요한 차이이다. 영화 전체를 신지의 POV로 삼아 단절된 시간을 그대로 드러내듯 난해한 설정들을 설명 없이 쏟아내고, 신지와 카오루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계속해서 신지의 소외감을 유발하는 등 Q는 구조적으로도 카오루를 영화의 중심에 놓고 신지가 그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도록 짜여 있다. 물론 이 때문에 신지가 극단적인 고립감과 나기사 카오루의 사랑, 결단의 실패를 경험하도록 인공적으로 구성된 실험실이라는 인상을 주고, 신지와 카오루를 제외한 인물들의 개성이 거세됐다는 구조적인 한계가 생긴다.
예컨대 신지를 제외한 인물들의 내면은 거의 신지의 시선에 국한된 일면으로만 드러나기에, 마리는 다카포에서와 달리 Q에서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고, 빌레의 다른 선원들은 신지의 소외감을 유발하는 장치로만 기능하고 있으며, Q의 레이는 다카포의 예열 차원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는 대목이 짧은 대사들을 간간이 읊는 것으로만 드러난다. 정리하자면 Q는 TVA 후반부 인물들의 고립감을 신지에게 국한하고, 나기사 카오루가 중심인 TVA 24화를 길게 늘여놓은 셈이다.
어찌 됐든 이쯤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왜 신지는 Q에서 재차 실패를 경험해야만 했나?
그 전에 먼저 ‘파’의 실패부터 톺아보자. TVA 8~19화를 변주 및 압축한 작품인 ‘파’에서 작중 인물들은 ‘식사’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먼저 타인에게 한 발짝 다가가 인물 간의 갈등을 풀려는 ‘변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변화’는 바르디엘의 등장으로 깨지고, 이내 신지의 레이를 구하겠다는 결단으로 인해 무화되는데, 어째서 신지는 이 실패를 겪어야만 했을까? 에반게리온처럼 미성숙한 인물이 어른이 되어가는 서사라면, 반복되는 실패에는 그것에 상응하는 이유와 변증법적 성장이 반드시 따라붙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는 이유 없는 고문일 뿐이다. 신지가 레이를 구하려 할 때의 대사를 눈여겨보자.
“내가 어떻게 되든 좋아… 세계가 어떻게 되든 좋아… 하지만 아야나미는… 적어도 아야나미만은…! 반드시 구해내겠어!”
신지의 이 결단은 언뜻 보면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고 신지가 성장을 이뤄 레이를 구해내는 감동적인 장면이라고(물론 이 말도 틀리지 않았다)만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결단은 어떻게 보면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는 미성숙의 발로다. 그 증거로 Q에서 신지는 ‘파’의 결단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져, 책임과 선택을 회피하기만 했다. 적어도 ‘주체적인’ 결단은 아니다. 따라서 ‘파’의 실패는 납득할 수 있다.
Q의 경우에는 사실 더 말하기 쉽다. 다카포의 후반부 신지와 카오루의 대화에서 짧게나마 명시적으로, 카오루가 신지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주며 자신에 의해서만 신지의 행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던 단계에서, 신지가 스스로 행복을 이룰 수 있음을 인정하는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Q는 카오루의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재차 주체적인 결단을 내리는 데 실패하는 신지와 그 실패를 막지 못하는 카오루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는데, 정작 카오루의 사랑의 난점과 불가능성은 다카포의 발화와 ‘루프’라는 설정으로만 명확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Q의 실패를 카오루의 사랑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찌어찌 이유를 찾아본다면, 신지가 13호기에 탑승하고 최후의 순간에 두 창을 뽑은 것을 (기저에 깔린 죄의식과) DSS 초커를 자신의 목에 대신 차는 카오루의 희생적 행동에 따른 맹목적 추동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신지를 둘러싼 환경, 즉 14년의 공백이 유발한 혼란이라는 현실적 층위의 문제로 읽힌다. 내면의 성장을 꾀하는 시리즈에서 중대한 결단의 실패가 인물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 변수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면, 이 실패는 그저 비극적인 운명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가질 수 없다. 그러니 ‘파’의 실패가 신지의 책임감 결여 및 미성숙을 드러냈듯이, Q의 실패도 타인의 사랑에 의탁한 구원이라는 방식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야만 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어렵긴 한 게, Q에서 드러나는 카오루의 사랑은 너무 아름답고 윤리적으로 흠결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카오루는 신지가 고립감에 빠져 있을 때 피아노 연탄으로 타인과 관계 맺으며 리듬을 맞추는 법을 알려주고, 존재론적 긍정을 넘어 (빌레의 선원들이 신지에게 에바에 타지 말라며 타박한 것과 달리) 신지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변화를 이끌어내는 ― ‘파’의 실패에서 변증법적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 훌륭한 멘토의 역할까지 수행했기 때문에, 이 사랑의 안티테제를 제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다소 편의적인 방식인 다카포의 발화와 ‘루프’라는 설정으로 이를 벌충하긴 했지만, Q의 실패가 특별한 서사적·주제적 의미로 귀속되지 못한 점이 아무래도 아쉽다. 그 때문에 Q는 원인은 흐릿하고 결과만 있는 공허한 외침이 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