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일기 1. 방콕에 가기로 했다
아, 퇴사하고 싶다
아니 이젠 퇴사를 해야겠다. 대학교 졸업 후 일 년간 조교 생활을 했다. 그리고 일 년 정도 엑소를 따라다니며 쉬다가 첫 직장에 입사를 했다. 그리고 사 년여 간, 열심히 회사를 다녔다. 입사 후 갑자기 직급이 사라진 회사에서 '1팀 디자인 리더'란 이름이 생겼으니 정말 할 만큼 했지. 모든 열의를 다 써버려 에너지가 고갈되기도 했지만 그 무엇보다 더 이상 이 회사를 다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소위 말하는 매너리즘에 빠진 것일 수도 있겠다. 이맘때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나와 친한 사람들 모두 하루에도 몇 번씩 "나 퇴사할래요."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점점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여기 더 이상 못 다니겠어요. 퇴사할래요."의 일원 중 한 명이었으므로 동지들이 떠날수록 초조해졌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러던 차에 무능력한 경력자가 경력자란 이유만으로 우리들의 배는 되는 연봉을 받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도 이 회사에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밟고 올라오는 사람들보다 경력자를 더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너무 무능력하잖아. 거기다 디자이너인데도 포트폴리오조차 보지 않고 뽑았단다. 심지어 그는 이전에도 우리 회사에 지원했다가 디자인이 너무 맞지 않아서 한번 떨어진 전적이 있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이 회사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그의 부인이 회사의 초창기 멤버라는 게 크게 작용했으리라. 여기에 성격까지 이상해 그로 인해 우리 팀원 대부분이 스트레스를 받고 퇴사를 생각했으며 퇴사를 했다. 결국 합심해 그를 몰아냈다. 뭐 그래도 제 발로 나갔으니 알량한 자존심은 지킨 셈. 그는 나갔으나 나는 이 회사에 남아있던 모든 정이 다 떨어졌다. 그래도 애증을 가지고 있던 회사였는데 '애'는 떨어지고 '증'만 남았다.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었다. 반팔을 입을 무렵 드디어 말했다.
"나 퇴사할게요."
그래서 이제 뭐하지?
퇴사를 말한 순간부터 이직을 위한 준비가 되어있었다. 일종의 구두 계약. 확실히 도장을 찍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곧 찍을 거란 모종의 이야기.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 더 시원하게 퇴사를 질렀다. 6월 말에 퇴사를 이야기하고 남은 휴가를 헤아려 7월 중순까지만 출근하기로 했다. 이직이 정해지지 않았더라도 대충 이맘때는 회사를 그만두려고 일수를 계산해 휴가를 써왔다. 내 나름의 만반의 준비랄까. 나는 여러 팀에 속해있었기에 여럿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이 나의 퇴사를 말릴 수 없게끔 확고하게 이야기했다. SH님이 "이건 뭐 무조건 안 다니겠다는 거네. 이해해요."라고 힘 빠진 듯 웃었다. 넌지시 재고할 생각이 없냐고 운을 띄웠으나 나의 뜻은 변함이 없었고 그렇게 퇴사가 정해졌다. 어차피 회사는 나 없어도 잘 돌아간다.
아무튼 퇴사 후 나도 전 직장 동료이자 친구이자 퇴사자 선배인 M처럼 '한 달간 발리 살기' 까진 아니더라도 그 반 정도는 해외에서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싶었다. 어차피 내 성격상 한 달이나 해외에서 돈 쓰며 놀 수 있지도 않으니 딱 그 반이면 족하다. 퇴사하겠다고 회사에 말을 던져놓고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찾았다. 가장 많이 갔던 일본은 지진 위험 때문에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다음으로 많이 간 대만은? 좋긴 하지만 뭔가 조금 더 여유가 느껴지면서 아직은 내게 좀 더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게 방콕이었다. 한 번 다녀와서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그래도 못 본 곳이, 못 가본 곳이 더 많은 곳. 급하게 결정된 터라 평소의 배는 되는 가격을 주고 티켓을 사야 했으나 열심히 일했는데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퇴사 후 나는 방콕으로 떠났다.
모두가 일할 때 떠날래
저녁 비행기라 세시까지 자다가 다섯 시쯤 나왔다. 집 앞에서 리무진을 탈까 하다 퇴근 시간과 겹칠듯해 오랜만에 전철을 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발권을 하러 갔는데 내 예상보다 줄이 길었다. 하지만 나는 어제 미리 웹 체크인을 해두어서 바로 발권할 수 있었다. 수하물까지 보내고 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환전해둔 돈을 찾았다. 여행을 앞두고 공항에서 환전하고 나라에 따라 포켓와이파이를 찾는 순간이 가장 떨리고 행복해. 입국심사까지 빠르게 받고 들어와 면세점을 기웃거렸다. 지난 칭다오 여행에서 남은 위안화로 블러셔와 립스틱을 하나 사고 김밥까지 사 먹었다.
인스타그램에 여행 가는 티를 팍팍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 퇴사한 나를 그리고 떠나는 나를 부러워했다. 못된 마음 한 스푼 담아서 이맛을 보려고 월요일 비행기를 고른 거다. 모두가 책상 앞에 앉아 일할 때 나는 놀 거야.
안내판을 보니 출발이 30분 지연되었다기에 의자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있다가 거의 끝물에 비행기를 탔다. 3 3 3 좌석 중 오른쪽 끝 창가 자리에 앉았다. 나는 장거리든 단거리든 무조건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데 바깥 구경하기도 좋고 머리를 기대어 자기도 좋다. 어차피 비행기 안에서는 화장실을 가지 않으니 어지간해서 복도로 나갈 일도 없고. 단점이라 하면 착륙 후 복도 쪽에 앉는 사람에 따라 밖으로 빨리 나가지 못한다는 건데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할 수 있어. 이번 방콕행에서는 복도 쪽에 다리가 조금 불편한 서양 할아버지가 앉았다. 빨리 내리려던 내 계획은 무산되었으나 그는 스윗 했다. 그와 내 사이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덕분에 편안한 비행.
이륙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간식과 음료를 나눠주었다. 콜라도, 주스도, 그리고 와인도 있었는데 나의 선택은 맥주! 무제한으로 준단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한 캔만. 땅콩은 맛없었고 (칭다오 꿀땅콩이 훨씬 맛있다) chang 맥주는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냥 하이네켄 마실걸 태국 간다고 괜히 태국 맥주 시켰네. 어쨌든 맥주와 땅콩 그리고 영화 「리틀포레스트」로 여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영화가 영화인지라 슬슬 배고프기 시작했는데 타이밍 좋게 기내식 타임이라니. 나는 돼지고기가 들어있는 기내식을 골랐다. 타이항공은 처음인지라 탑승전 기내식 등 이것저것 찾아보니 돼지고기는 호불호가 갈린단다. 나는 극호! 카레맛도 나고 김치도 주고 딱 좋았다. 그러나 이외에 케이크는 단것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도 너무 달았고 빵은 맛없었다. 그래도 괜찮아, 메인 디쉬가 맛있잖아.
기내식을 먹고 바로 잠들었다 깨어보니 어느새 태국 도착. 느리기로 악명 높은 방콕의 입국 심사지만 첫 여행에서도 이번 여행에서도 기다림 없이 빠르게 통과했다. 그 덕분인지 이번에도 거의 모든 여행에서 그렇듯 캐리어보다 내 몸이 더 빨리 나왔다. 캐리어를 기다리며 늘 하는 생각은 '아 그냥 가지고 탈걸 그랬나?'. 이번에는 공항에서 호텔까지 픽업 서비스를 신청해놓은 상태라 예약 시간에 늦을까 마음이 급해진다.
무사히 예약된 시간에 픽업 스캐너의 픽업 기사님을 만나 공항을 떠났다. 30여분을 달려 호텔에 도착했는데, 기사님조차 너무 구석진 곳이라 찾기 힘들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날 밖으로 나와보니 내가 아는 곳 부근이었지만 밤에는 나도 과연 내가 이 길을 홀로 다닐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떨었더랬다.
피곤해서 방은 대충 쓱 둘러보고 씻고 바로 누웠다. 2인용 커다란 침대 위에 홀로 누워있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아직은 퇴사했다는 게 크게 와 닿지가 않는다. 한동안 이렇게 유유자적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봐야,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나지 않을까. 한국에서 떠나는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다들 일할 때 떠난다! 난 퇴사했어!' 이 생각이 가득했는데 그것도 순간. 아 모르겠다,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하자.
2018년 7월 23일
캐논 EOS 6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