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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애진 May 24. 2020

나의 사교육 인생

'사교육'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내 인생에 비집고 들어온 것은 언제였을까. 그 시작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 사교육을 빼 놓고는 지금까지의 내 교육인생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私)교육, 사적인 교육 즉, 개인의 자산으로 배우는 개인적인 교육.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배운 세 가지는 지극히 공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먼저,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처절하게 ‘돈’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 물들어버린 교육의 현실이었다. 바로 교육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다.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라온 나에게 공부는 나의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갖춰진 것, 준비된 것’이었다. 학원, 과외는 나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며, 이 선택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내게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단순히 개인의 의지가 박약한 아이들로 비춰진 것은 당연했다. 지극히 경제적으로 어려워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은 그저 인간극장에서만 펼쳐지는 다큐멘터리에 불과했다. 나와는 동떨어진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큐는 현실의 이야기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TV속이 아닌 바로 내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학교, 집, 학교, 집을 반복하는 고등학교의 반복된 생활에 익숙해진 2학년 무렵, 절친한 친구로부터 조용하지만 담담한 고백을 들었다. 한탄도 아니었고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에만 감춰두었던 응어리진 것들을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풀어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듣게 된 나와 다른 가정환경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는 차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듣고 있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혼위기에 처한 부모님의 관계는 물론, 당장의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가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진로마저 교사나 군인을 생각 중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그 친구가 가진 소원은 나에겐 지극히 소박한 것이었다. 제발 고3때라도 딱 한번만 학원을 다녀보고 싶다는 것. ‘어?...이게 아닌데. 무언가 잘못 되었다.’ 머리에서 띵 하고 경종이 울렸다. 그렇다. 사실 나는 이것이 진짜 현실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껏 내 마음 편하고자 이러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아름답고 편한 길만 보려 했던 것이다.


선천적인 가정환경이 자식의 후천적 미래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는 끔직한 오늘날. 교육이 계급 간 불평등을 제어하는 기제가 되지 못하고, 거꾸로 소득과 계급구조 위에 교육이 덧씌워져있는 형국, 그렇게 시장 불평등이 교육의 영역마저 지배해버린 상황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워진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학원을 다니기 싫은 나와, 학원을 다니고 싶은 친구. 시작부터 달랐던 우리 둘이 만약 그 출발선을 같이 했었다면, 지금 나와 그 친구는 과연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있었을까? 순간, 지금 나의 성적은 아주 약간의 나의 의지와 8할의 돈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덮쳐왔다. 갑자기 대상 모를 누군가에게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지금 반칙을 하고 있다는, 공정하지 못한 시합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었다. ‘그렇다면 이 죄책감을 어떻게 하면 떨쳐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은 ‘친구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주고, 우리가 그제 서야 같은 조건에서 시합을 하게 된다면, 그러면 공정한 시합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 당시, 고작 학생에 불과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엄마에게 부탁해 친구 모르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 뿐 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금전적 지원으로 인한 기회의 균등이 교육적 평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을까? 오히려 사교육의 과열을 심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못한 의제로 남아있다.



둘째,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나 또한 다른 알들을 떨어뜨리려는 뻐꾸기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정하고 싶지만 슬프게도 그 경쟁의 시작은 초등학생 때부터였다. 다른 아이와의 ‘비교’는 내가 모자란 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오직 ‘성적’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에 의해 일렬로 줄 세워지고, 평가받는 사회에서 내가 괜찮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공부를 더 잘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미비했던 이 경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학력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파장이 배가 되었다. 고작 점수 1점, 등수 1등의 차이로 입시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이, 그로 인해 내 인생의 희비가 엇갈릴 수 있다는 것이 극심한 두려움을 야기했다. 이렇게 상대평가에 따른 등수의 차이는 선행학습의 열풍을 일으켰고, 우리들은 너도 나도 학원에 보내져서 학교 진도로는 따라잡지도 못할 과정을 배웠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아이들은 몇 학년 뒤의 과정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남들보다 앞서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지금 고등학생 당시 썼던 일기장을 펴 보면 큼지막하게 ‘공부와 성적이 친구를 순식간에 적으로 만들고 있다 –기말고사 기간-’라는 두려움 가득한 문장이 적혀있다. ‘고등학교 친구가 진짜 친구다’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선의의 경쟁으로 여기며 서로의 성공을 바랐지만, 동시에 한명이 성공하면 다른 한명은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자꾸만 친구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무관심한 척 친구에게 네가 다니는 학원은 어떤지, 어디가 괜찮은지 물어보는 반면, 친구가 행여나 나에게 경각심이 들 것이 두려워 과외를 한다는 사실을 숨기게 되었다. 그렇게 궁금함을 가장한 취조 행위는 ‘위선’이라는 또 다른 죄책감을 가져왔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탈출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이 냉혹한 경쟁의 굴레는 도저히 끝을 보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각종 대외활동, 공인영어점수 등 오로지 사회의 시선을 고려한 소위 말하는 ‘스펙’이라고 말하는 것을 쌓기에 혈안 되어있는 대학생이 또 지금의 현실이었다. 비단 경쟁은 우리나라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이번 여름 인도여행을 하다가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인도의 대학교 교수님을 만나 친분을 맺게 되었다. 지금 3학년이라는 내게 “그럼 졸업 하려면 1년 남았겠구나!” 말씀하시는 교수님께 잘 모르지만 휴학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한국 대학생들은 휴학이 매우 일반화 되어있는데 인도는 휴학하게 되면 그들은 사회에서 실패하게 돼. 매우 극심한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절대 휴학은 생각도 할 수 없어." 라고 답하시는 교수님. 또 한 번의 경종이 울린다. 갑자기 영화 <세 얼간이>에서 대학 총장이 뻐꾸기를 비유해 경쟁사회를 설명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레이스(race)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짓밟힐 거다. 너희들은 뻐꾸기다. 경쟁하거나, 죽거나.” 숨 막히는 경쟁사회. ‘우리는 결코 이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걸까? 무엇이 옳은 걸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아직도 계속되는 풀리지 않는 두 번째 의제다.



마지막으로, ‘대학입시’라는 바로 닥친 눈앞의 공부가 아닌, ‘인생’이라는 더 넓고 더 먼 것을 배웠다. 참 모순적이게도 나에게 불평등과 경쟁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알려주었던 사교육이 동시에 이 두 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 때 가장 영향이 컸던 것이 바로 사교육자, 그러니까 과외 선생님들의 태도와 성격이었다. 누군가가 내게 공교육자와 다른 사교육자의 특징을 묻는다면,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성실’, ‘변화’, ‘자기계발’ 이 세 단어를 외칠 것이다. 분명 이는 지방의 평준화지역의 사립학교에 다녔던 내 환경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비교적 안일하고, 폐쇄적이었던 학교의 선생님들과는 달리 과외 선생님들은 당신의 인생을 즐기려 노력했고, 개방적이었다. 공부, 입시만 외치던 학교 선생님과는 달리 과외 선생님은 내가 공부에 지쳐할 때마다 당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자극을 불어 넣어주기도 했고, 어떤 날은 사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공부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일 수 있다며 여러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사에 대해 조금씩 들려주기도 했다.


이러한 차이는 나와 선생님간의 거리에서도 발생했다. 이미 입시주의에 지쳐 더 이상 학생들과의 소통을 시도하지 않고,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던 나의 고3의 담임선생님, 진정 나를 이해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업적을 드높여줄 ‘좋은 성적의 아이’라는 시선으로만 나를 바라보았던 학년부장 선생님 등. 학교의 선생님들은 나를 바라봐 주지 않았다. 내 생각을 존중해주지 않았다. 입시철이 되었을 때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묻기 보다는 나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교의 분포 표를 보여줄 뿐이었다. 이것이 내가 졸업 후 고등학교로 단 한 번도 발길을 돌리지 않는 이유다. 나를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오직 ‘성적’으로만 여겼던 그 곳에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반면, 과외 선생님과 나의 거리는 가까웠다. 때문에 공부와 관련해서, 진로와 관련해서 나아가 인생과 관련해서 깊은 대화를 꺼낼 수 있었고, 이해 받을 수도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과외 경험으로 사교육을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사교육은 어서 고등학교를 벗어나 대학생이 되어 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불어 넣어주는 기폭제가 되었다. 인생의 성공은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들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진한 교훈을 얻었다. 인생은 그렇게 쉽게 성패가 결정되지 않기에, 입시에만 집중된 입시주의 교육의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사교육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얻은 세 가지의 값진 선물이자, 숙제이다. 물론 사교육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 공교육은 나라에서 국민에게 제공하는 아주 최소한의 보편적인 교육일 뿐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과열이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그에 따른 부작용을 피할 수는 없다. 이렇듯 개인적 영역에서 배운 세 가지 공적 영역의 문제의식은 나에게 깊은 충격으로 각인되어 있는 탓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여년이 지난 지금, 점차 나의 모든 신경이 ‘교육’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진다.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그 폐해를 직접 겪었기에 그 해결의 필요성 또한 절실히 인식하게 된 것일까. ‘교육의 사회적 불평등’, ‘극심한 교육경쟁’, ‘지나친 입시주의’ 가장 궁금하고, 해결하고 싶은 이 세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이해하고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은 계속 되고 있다.



written i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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