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서 맥주 먹으며 쓴 일기(센치주의!)
얼마 전 한 서점에서 북토크쇼를 진행했다. 북토크쇼에는 10명 남짓 참석했는데, 그중 절반은 우리 카페&서점의 손님들이자 친구들이었다. 기어코 시간을 내서 방문해주는 그들의 진심 어린 애정과 사랑에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겨우 눈물샘에 붙들어놓는다. 낯선 이들이 아닌 마음 편한 이들이 함께라서 북토크쇼는 편안한 분위기에 웃으며 잘 마무리되었다. 친구들과 맥주 한 잔 하려고 하는데, 행사 진행자가 나를 붙든다. “대표님이 차 한잔 하자는데, 다 같이 가실래요?” 친구들도 흔쾌히 수락해서 우리는 다 같이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북토크쇼의 여운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으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순식간에 훈훈하게 달구었다.
꼭대기층에 내리니 예쁜 옥상정원이 보이고, 고즈넉한 풍경과 옛스러운 예술작품들이 보인다. ‘우와’ 우리는 입을 떡 벌리며 구경한다. 그중 한 친구는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른다. “우리 공간도 열심히 노력해서 이렇게 성장해야죠?” 친구의 말에 우리는 다 같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옥상정원을 지나 문이 보인다. 성큼 들어가려는데 한 친구가 나를 막아선다. 친구의 시선에는 내 손에 들린 박스가 보인다. 오늘 북토크쇼를 위해 바리바리 박스에 짐을 싸온데다가, 두꺼운 패딩을 입어 굉장히 둔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패딩을 벗고, 박스 위에 살포시 올려둔다. 이제, 드디어! 문을 열고 입성!
인자한 인상의 대표님과 정겨운 인사를 나눈다. 우리 친구들, 그리고 대표님의 아드님과 행사 진행자 분도 함께 자리한다. 우리는 북토크쇼 때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길어져 다채로운 이야기가 찻잔 위에 얹어진다. 최근 동네 카페&서점의 어려움을 시작으로 곧 사소한 이야기로도 번진다. 대표님 아드님은 나와 동갑으로 현재 분점의 지점장을 맡고 있다. 조만간 네 번째 분점을 낸다는 소식 등등. 입에 감도는 차가 조금은 씁쓸하다.
이어서 함께 자리한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내 친구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사랑도 아름답다. 친구가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애정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나는 그 친구에게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곧 매료되었고, 존경하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하고 싶어요’, ‘우리 아이를 친구한테 맡기고 싶어요’라고 말할 만큼 진심으로 너무 멋진 사람이다. 누구든 그녀를 보면 반하게 될 거다 분명. 아니나 다를까, 대표님과 행사 진행자 분도 그녀에게 푹 빠진 게 보인다. 거봐! 내 친구 짱 멋지지? 어깨가 으쓱해지는 그 순간, 행사 진행자분이 내 친구에게 명함을 내민다. “다음에 우리랑 같이….” 어?
그 이후로도 우리는 몇 번이나 찻잔을 비웠고, 아쉬움의 작별인사를 했다. 연이은 수다로 온 몸에 탈력감이 온다. 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보고 싶다.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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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쇼는 정말이지 행복했다. 근데 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걸까. 왜 마음이 이다지도 씁쓸한 걸까. 허무함, 허탈함과 무력감이 나를 휩쓴다. 왜. 왜일까. 그래. 그렇구나. 현재의 카페&서점을 운영하며 한계를 명확히 깨닫고 있다. 꿈꾸듯 행복한 지금의 상황을 지속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다. 매일 하루에 두어 번 경운기가 털털거리며 지나가는 이 외딴곳, 8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뚜렷했다. 새로운 메뉴도 만들고 싶고, 새로운 책도 소개하고 싶고, 새로운 전시나 문화프로그램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주어진 주머니는 작았고, 공간도 협소했다. 어느새 나는 ‘조금만 더 넓었으면’, ‘조금만 더 돈이 있었다면’라고 읊조리고 있다. 4년 차 공간의 곳곳에 낡은 흔적들이 보여서 더 내 마음을 긁어둔다. 하지만 내가 간절히 원하던걸 이미 가진이가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걸 가진이에 대한 부러움, 질투, 열등감이 샘솟는다. ‘내가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난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운 소리를 스스로에게 내뱉는다.
그러나 나를 더 아쉽게 하는 건 ‘친구’였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대신, 내가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기로 했다. 내게 6층짜리 건물은 없어도, 내게 돈이 없어도, 내게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넓은 공간이 없어도, 내게는 ‘친구’라는 존재가 있지 않은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북토크쇼를 와준 친구들, 따스한 응원을 보낸 친구들, 매 순간 사랑이 뭔지 알게 해 주는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그날 행사 진행자가 선생님인 친구에게 내민 명함 한 장은 내게 큰 파문이었다. 내게 남은 것은 이제 ‘친구’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도 떠나갈 수 있구나. 깨닫는다. 애정은 양방향이 아닌, 일방향이 될 수 있음을. 그제야 새삼 깨닫는다.
손님을 ‘친구’라고 부른 순간, 그들을 진심으로 ‘친구’라고 대한 순간, 내 마음의 둑은 허물어지고 만다.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게 된다. 애정을 다하게 된다. 이 애정이란 건, 내가 애정을 준 만큼 받기를 바라는 욕망이자 열망적 감정이라, 나도 모르게 친구들의 애정을 갈구하게 된다. ‘내가 사랑해주는 만큼, 날 사랑해줘’,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만큼, 부디 날 생각해줘’라는 갈구.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손님과 친하다고 해서, 손님과 내가 서로 ‘친구’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장의 입장과 손님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음을 늦게야 깨닫고 만다. 단골손님이 어느 날 옆집 카페를 가게 되었을 때, 늘 우리 서점에서 책을 사보던 친구가 다른 서점에서 책을 살 때, 우리 공간에서 문화를 즐기던 이가 다른 공간을 더 선호하게 되는 순간마다 친구를 떠나선 ‘입장차’를 인정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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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들고 뒤척이며 있는데 ‘카톡’ 문자메시지가 온다. 나와 같이 잠을 이루지 못한 한 친구로부터의 마음이 도착했다.
“집에 잘 들어가셨나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마음이 좀 씁쓸해서 메시지를 남겨요. 언제나 든든한 편이 되어줄게요. 늘 응원할게요. 사랑합니다.”
친구는 알았구나. 정말 진심으로 애정을 다했기에, 진심으로 이 공간을 함께 했기에, 정말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진실했기에 그 친구는 알았던 거다. 티 내지 않았던 나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붙잡고 있었던 나의 현실을. 감정의 파도에서 어쩔 줄 모르며 한없이 침전하던 내게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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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사람을 통해 회복한다. 더 이상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겠다고 다짐해봐도, 우리는 어느새 또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사귀고,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만나는 과정에서 오는 감정의 소모, 사귀는 과정에서 오는 애정의 정도와 방향의 차이, 지속하는 과정에서 오는 애정의 깊이 차로 인한 갈등과 고난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벽을 무너뜨릴 만큼 거대한 감정이 우리를 압도하는 순간이 있다. 내겐 오늘이 지금 그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