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 흔하게 널려있는 사물, 그 사물에 의미가 생기고, 사물과의 시간이 축적되고 나면 그건 더 이상 사물이 아니라 보물이 된다. 단 한 글자 차이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용도를 다하면 버려지는 사물에서 보관해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여겨지니 말이다. 내게는 아들이 건네준 머리끈이 그랬다. 다섯 살 무렵 아들은 아빠의 손을 잡고 동네 마을 행사에 놀러 갔었다.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함께하지 못했는데, 아들은 그게 마음이 쓰였는지 장터에서 파는 물건을 볼 때마다 '엄마 사줄까?', '엄마가 좋아할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남편은 아이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네주었고, 아들은 고심 끝에 핑크색 티니핑 캐릭터가 그려진 머리끈을 사 왔다. 집에 온 아들은 기쁜 얼굴로 내게 머리끈을 내밀었고, 나는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시선은 남편을 향했다. '이런 데에 돈 쓰면 어떻게 해? 설마 네가 사자고 했어?'라는 언어가 담긴 눈빛을 던지면서 말이다. 남편은 서둘러 말했다. 아들이 꼭 사주고 싶어 했다고, 함께하지 못한 엄마를 위한 선물이라고. 그 말에 나는 왜인지 울컥했다. 어린아이의 몽글몽글함, 동글동글함이랄까. 그것들이 내 마음을 한 없이 유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나는 티니핑 머리끈을 질끈 묶고 출근을 했다. 가끔 부끄럽기도 했으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창피함을 이겼다. 그 뒤 나는 머리끈에 묻은 먼지를 살살 닦고 내 화장대 제일 왼쪽 서랍, 나의 보물함에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일 년쯤 흘러, 아들은 일곱 살이 되었다. 키도 훌쩍 커서 아침마다 나와 함께 같은 화장대에서 로션을 바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아들이 내 보물함을 열게 된 건 시간의 당연한 결과였다. 아들은 내 보물함 속 티니핑 머리끈을 발견했다. 본인이 선물해 준 건 까마득히 잊고선, 머리끈을 발견하자마자 이렇게 외친다.
"은지* 가져다줘야지!"
*가명
세상에! 나는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눈을 껌뻑였다. 아이는 눈치도 없이 머리끈을 제 유치원 가방에 집어넣고 있었다. 기가 막혀서 멍하니 있는 내게 아들의 웃음은 천진난만함을 넘어선 어떠한 뻔뻔함으로까지 보였다. 그리고 아들은 며칠간 그 머리끈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나는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은지 준다더니, 왜? 다시 엄마한테 내놔"
아들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며 '아직 은지를 못 만났어' '부끄러워서'라는 이유를 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유치원 선생님에게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들이 다른 반에 무턱대고 찾아가 은지를 향해 '잠깐 나와봐'라고 하더니, 머리끈 하나를 건네었는데 그게 지호의 물건이 맞는지 확인차 연락했다고 했다. 티니핑 머리끈은 빛을 바래서 전혀 새것 같지도 않았을뿐더러, 아들의 물건으로마저 보이지 않았으니 선생님의 의문도 당연했다. 나는 어느새 '제 거였는데요··· 분명 제 거였는데요'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맥주를 마시며 쓰린 속을 달랬더랬다.
아들은 그 뒤로도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들을 해댔다. '은지랑 결혼해야지' 라든가 '카피바라 키링 두 개 사줘, 은지랑 같이하게'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중에 압권은 이거다. 전날 저녁 아들이 오른손으로 가림막을 만든 채, 왼손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고개를 빼꼼 내밀어봤는데, 아들은 나를 째려보더니 소리쳤다. "보지 마! 멀리가 있어!" 나는 순순히 물러나주었는데, 다음날 아이 유치원 가방에서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편지였다.
편지 반는 사람 김은지
조싶이들드세요.
(번역: 편지 받는 사람 김은지, 조심히 뜯으세요)
심지어 엄마가 열어볼까 싶어 테이프로 밀봉까지 해둔 상태였다. 몰래 뜯어보려고 했는데, 종이의 연약함이 나의 의지를 뜯어말렸다. 결국 나는 은지 엄마에게 몰래 SOS를 쳤다. 은지가 편지를 받으면, 그 내용을 공유해 줄 수 있냐는 질척거림이었다. 오후 네시 반쯤 되어서 은지 엄마에게서 사진이 두 장 날아왔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이름 김은지
유치원 근처 놀이터에서 만나
거기서 미할가(?) 미니카 들고 갈게
방학에 만나 안녕
보넨사람 박지호
놀사람 김은지, 박지호
미글럼클......터널.....
생각보다 편지의 형식을 갖췄음에 놀라고, 예상했던 표현(좋아해라던가, 사랑해라던가)이 없어서 안도하고, 디테일한 만남의 장소까지 구현되어 있어 정말이지 귀여워서 심장이 근질거렸다. 좋아하는 친구랑 만나니까 자신이 가장 애정하는 장난감을 가져가겠다는, 만나는 장소까지 친절히 알려준 아들의 마음에 나는 어찌나 울컥하전지. 티니핑 머리를 뺏긴 날, 나는 아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좋냐? 좋아? 은지는 좋아해?"
뼈가 있는 날카로운 질문이건만,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했다.
"은지가 표현을 해줘야 좋아하는지 알지! 은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너무너무 좋았어"
선물을 주는 그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진정한 선물의 의미를 배웠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귀여움으로 나의 분노까지 녹여버리는 아들에게서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결국 우리가 이 삶을 계속 이어나가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라는 것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