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일 수밖에 없는 엄마들
생명이 몸에서 자라나는 신비한 경험을 통해 엄마가 된다. 아주 작은 세포가 한 생명으로 진화해 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직접 느끼고, 경험했지만 그것들을 온전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필름처럼 지나가는 수많은 기억 속에는 기쁨, 고통, 환희, 아픔 등이 공존한다. 그것들과 함께 주어진 책임과 의무는 쉽사리 누군가와 나눠가질 수 없다. 그것이 너무 힘들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세상에 모든 엄마들은 모성을 지녔고, 모성으로 인해 느낄 수밖에 없는 애정과 욕구들로 인해 고통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켜 낼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런 엄마의 품에서 세상에 태어난 생명들은 세상의 전부가 엄마의 자궁이었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엄마와 연결된 채로 세상을 느끼고 이해하며 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역할을 혼자서 감당하기 벅찬 삶들이 있다. 엄마도 돈을 벌어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먹고, 자고, 자신의 삶을 영위해야 하니깐. 그래서 자신의 역할을 나눠 줄 수 있는 '누군가'가 꼭 필요하기도 하다. 가족과 친지들이 그 역할을 나눠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워킹맘 지선에게는 보모 한매가 유일했다. 적어도 한매가 아이와 함께 사라지기 전까지 그녀의 삶은 버거워 보였지만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고, 자신만큼 아이를 사랑해주는 한매가 있었기에. 비록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바쁘게 일을 해야 하는 일상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자라나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라 여기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해온 그녀였다. 적어도 한매가 아이와 함께 사라지기 전까지는.
잃어버린 아이로 인해 그녀는 정신줄을 놓는다. 하지만 아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벼랑 끝에 서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난 삶을 회고한다. 그렇게 자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단서들의 퍼즐 조각이 완성되어 가면서 한매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지선은 보모였던 한매를 자신의 아이를 위해 필요한 수단적인 존재로 여겼음을 알게 된다. 고마운 존재로 여겼지만 그녀의 삶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매가 없었다면 영위할 수 없었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했다.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키우기 위해, 양육권 소송에서 지지 않기 위해, 지선은 한매를 아이를 잘 돌보는 보모로 자신 곁에 있어야 하는 존재로만 여겼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타인의 증언을 통해 알게 된 한매의 진짜 모습은 안쓰럽고, 처량하고, 섬뜩했다. 자신만큼 모성애를 가진 한 아이의 엄마였고, 그 아이가 숨을 거둔 후, 그녀의 모성애가 집어삼켜 버린 것은 그녀의 인격 그 자체였다. 엄마가 되기 전부터 그녀의 삶은 불행했지만 아픈 아이를 낳은 후 최선을 다해 헌신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남편에게로부터 도망첬고, 아이의 수술비를 위해 몸을 팔아야 했다. 아이의 수술을 위해 장기를 팔아야 했던 순간에도 그녀는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성애는 그렇게 그녀의 삶을 갉아먹기 시작했고, 그렇게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잃었을 때, 한매는 자신의 인격도 함께 잃어버린다.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을 만큼 위대한 모성애였지만 일그러진 그것은 상실감과 함께 원망과 증오로 변해버린다.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 한, 그래서 죽은 아이를 양지바른 곳에 묻지도 못 한 그녀. 한매는 지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도망친다.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아이를 지키지 못 한 죄책감은 지선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착각하도록 이끌었고, 그것은 모성을 되찾았다는 착각과 함께 행복한 삶으로의 도피를 실행하도록 한다. 결국, 그녀가 가장 원망하고 분노했던 대상은 자신의 아이의 병원 침대를 빼앗은 지선도, 아이의 수술을 반대했던 아비도 아니었다. 끝내, 그 모든 것으로부터 아이를 지켜내지 못했던 힘없고, 나약했던 자신이었다. 스스로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지선의 아이를 지키는 사람이 아닌 가장 위협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기에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는 선택을 한다.
이 영화를 보고, 엄마들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면, 그 눈물은 잃었던 아이를 되찾은 사건에 대한 안도의 눈물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가 아파도, 아이가 다쳐도, 설사, 아이가 불치병으로 목숨을 잃는다거나 하느님도 구원할 수 없는 재난으로 목숨을 잃는다 해도 우리네 엄마들은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모성애가 만들어낸 원죄일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인 암묵적 동의에 의해 확대되고, 전파되기도 한다. 그래서 엄마들은 세상에 생명을 탄생시켰다는 이유만으로도 평생 죄인 취급을 받기도 하고,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거나 스스로의 모습을 잃어버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선은 한매의 마지막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속에 몸을 던져 구원의 손길을 뻗는다. 아이를 잃고 죄인이 되어버린 그 고통의 깊이를 짐작하기에. 그녀의 일그러진 모성이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엄마이기에.